격투기 무대에서 이른바 '헤비급'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복싱, 킥복싱, 무에타이, 입식 격투기, 종합격투기 등 각 종목별로 체급별 세분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팬들의 가장 뜨거운 시선을 끄는 체급은 단연 헤비급(혹은 무제한급)이다. 가장 무거운 체급, 타고난 사이즈를 갖춘 '괴수들의 전장'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선수들이 마주보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링이 꽉 차보일 정도다.

이를 입증하듯 시대별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파이터의 대다수는 헤비급에서 뛰는 선수들이 첫손에 꼽혔다. '영장류 최강'으로 불렸던 아마레슬링계의 괴물 알렉산더 카렐린, 아마복싱 헤비급의 전설 펠릭스 사본, 10여 년간 종합격투기 무대서 황제로 통했던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UFC를 대표하던 괴물 그래플러 케인 벨라스케즈 등은 헤비급을 정복하는 순간 다른 체급 강자들까지 자연스럽게 발 밑에 두고는 했다.

이는 오랜 역사를 가진 프로복싱 역시 마찬가지다. 각 체급별로 쟁쟁한 전설급 복서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씩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최강이라는 이름을 거론할 때는 헤비급에서 활약했던 레전드 복서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간 헤비급은 기량과 캐릭터를 겸비한 쟁쟁한 복서들을 탄생시켰다. 복싱의 아이콘 같은 존재가 된 '복싱 황제' 무하마드 알리를 필두로 '마네사의 학살자' 잭 뎀프시,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 무패 전설의 록키 마르시아노, '스모킹' 조 프레이저, '해머펀치' 조지 포먼, '링 위의 신사' 에반더 홀리필드, '닥터 아이언 피스트' 비탈리 클리츠코, '더 스틸해머' 블라디미르 클리츠코 형제, '러시안 자이언트' 니콜라이 발루에프 등은 하나같이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헤비급 복싱사에 가로새겼다.

그중에서도 많은 팬들 사이에서 유독 잊혀 지지 않는 이름이 있으니 다름 아닌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53·미국)이 그 주인공이다. 은퇴한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복싱팬들은 물론 복싱에 크게 관심 없는 일반 팬들 사이에서도 압도적 유명세를 자랑한다.

물론 여기에는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각종 행사나 대중매체에서 얼굴을 비치고 있다는 부분도 크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타이슨이 이름값, 유명세에서 관심을 끌만한 인물이기에 많은 곳에서 불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젊은 시절과 비교해 외모, 분위기 등에서 많은 변화가 생기기는 했으나 타이슨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많은 팬들은 함성과 박수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다.

그만큼 타이슨은 헤비급 프로복싱사에서 식지 않는 '핫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열혈 복싱팬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강펀처 중 한명으로 기억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사고뭉치 악동'이나 '핵이빨'로 더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전체급을 통틀어도 은퇴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복서가 이만큼 유명세를 보여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할 수 있다.
 
 마이크 타이슨의 유명도는 어지간한 현역 스타 복서 이상이다.

마이크 타이슨의 유명도는 어지간한 현역 스타 복서 이상이다. ⓒ 마이크 타이슨 페이스북

 
화려했던 전성기, 성공도 몰락도 빨랐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높은 이름값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이슨의 전성기는 엄청났다. 헤비급 복서 치고는 작은 축(179cm·109kg)에 속했지만 특유의 유연성과 엄청난 순간 폭발력을 바탕으로 자신보다 훨씬 큰 경쟁자들을 줄줄이 KO로 무너뜨린 당대 최고의 강타자였다. 현재까지도 헤비급 역사에서 가장 강했던 하드펀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지에서의 링네임은 '아이언맨(Iron Man)'이었으나 국내에서는 '핵주먹'으로 불렸다.

프로 통산 전적 58전 50승 44KO 6패 2무효의 성적을 남긴 그는 18살의 어린 나이에 프로무대에 데뷔했는데 이후 무려 37연승, 19연속 KO라는 돌풍의 중심에 서며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1986년 11월 23일 WBC(세계복싱평의회)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트레비 버빅을 KO로 누르고 최연소 헤비급 세계챔피언(20살 4개월 22일)의 신화를 창조했다.

다음 해인 1987년 3월 WBA(세계복싱협회) 타이틀, 8월에는 IBF(국제권투연맹) 왕좌까지 거머쥐며 가장 권위 있는 3개 복싱 단체의 타이틀 획득이라는 신기원을 이룩한다. 더욱이 대부분의 경기를 초반 KO로 장식하는 놀라운 경기력으로 전 세계 복싱팬들을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전성기가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성실성만 뒷받침되었더라면 프로복싱의 상당수 기록을 줄줄이 깼을 것이라는게 전문가와 팬들의 공통된 중론이지만 아쉽게도 타이슨은 사고뭉치였다. 본래도 악동 기질이 다분했던 데다 어린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리다 보니 주변의 유혹이 많았고 그 결과 온갖 사건사고의 중심에 서서 스스로를 망가뜨렸다.

이는 스승 커스 다마토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는데 마약복용, 각종 스캔들과 폭력문제 등을 일으키며 한창 상승세를 타야할 전성기를 불미스러운 일로 얼룩지게 됐다. 결국 1990년 2월 11일 일본 도쿄돔에서 있었던 WBC, WBA, IBF 헤비급 통합타이틀전서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제임스 더글러스를 맞아 10회에 KO로 무너지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이 타이슨의 압승을 예상하던 상황에서 벌어진 대형사고였다.

한번 금이 간 단단한 성벽은 이후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었다. 연습 부족으로 인한 기량하락 등을 지적받던 그는 이후 설상가상으로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며 교도소까지 다녀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 9월 6일 WBA 챔피언 자리를 되찾는 기염을 토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에반더 홀리필드와의 연전은 타이슨 복싱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첫 대결에서 TKO로 무너지며 타이틀을 빼앗긴 타이슨은 리매치에서 복수전에 나서지만 한창때에 비해 완전히 망가진 몸 상태로 해볼 수 있는 것은 별반 없었다. 결국 몸은 안 따르고 화는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 해서는 안되는 반칙까지 저질렀다.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복싱 역사에 남을 대소동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핵펀치'가 '핵이빨'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홀리필드의 교묘한 반칙성 플레이도 원인으로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이빨을 들이대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후 기세가 꺾인 타이슨은 레녹스 루이스, 케빈 맥브라이드 등에게 줄줄이 패배를 당하며 2005년 링을 완전히 떠나게 된다.
 
 한창때 마이크 타이슨의 펀치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한창때 마이크 타이슨의 펀치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 마이크 타이슨 페이스북

 
링위의 맹수, 지금도 회자되는 핵펀치 신화
 
레전드 헤비급 복서들을 보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신만의 남다른 색깔을 보여줬다.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로 표현될 만큼 예술에 가까운 복싱 스타일을 보여줬다. 헤비급임에도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통해 어지간한 인파이터 못지않은 재미를 안겨줬다.

날렵함을 넘어 환상적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스텝을 통해 상대와 거리를 두면서도 빈틈이 보였다 싶으면 날카로운 반격을 망설이지 않았고, 승기를 잡으면 인파이터 못지않게 과감하게 들어가 상대의 혼을 빼앗는 연타 기술로 승부를 끝내버렸다. 역대 최고의 하드펀처인 포먼을 KO로 잡아낸 것이 이를 입증한다.

포먼은 복싱 역사상 최고의 강펀처로 꼽히는 슬러거다. 어니 세이버즈, 소니 리스턴, 켄 노튼 등 쟁쟁한 역대급 헤비급 슬러거들 중에서도 최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우람한 체구에 워낙 강한 펀치를 가지고 있는지라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고 섬세한 테크닉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팔 힘으로 가볍게 툭툭치는 것 같은데 쉽게 넉아웃 승부가 나왔다. 가드 위로 맞아도 상대는 충격을 받고 일그러진 얼굴로 힘들어하기 일쑤였다. 그만큼 자신이 가진 힘을 적재적소에서 잘 사용할 줄 아는 복서였다는 평가다.

타이슨은 마치 폭격기를 연상시키는 인파이팅을 통해 전 세계 팬들에게 깊은 임팩트를 남겼다. 헤비급에서 작은 축에 속하는 타이슨이 특유의 순간 돌파력과 강펀치를 살려 파고들어 정타를 때리면 대부분의 상대는 체구에 상관없이 심한 충격을 받고 큰 동작으로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타이슨보다 체격이 월등한 선수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큰 대 자로 벌러덩 나가떨어지는 것은 물론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비틀거리다 주저앉는 등 제대로 정타를 허용하고 버틴 선수는 없었다. 시각적인 임팩트 역시 컸다. 전성기 타이슨에 대한 팬들의 인상이 강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타이슨은 마치 한 마리 맹수와 같은 돌파력을 자랑했다. 아무리 펀치가 강하다 해도 작은 신장의 타이슨이 상대를 때리기 위해서는 일단 파고드는 게 먼저였다. 빠르고 유연한데다 순간적 타이밍 싸움에서도 능했던 타이슨은 이러한 플레이를 굉장히 잘했다. 가드를 굳히고 허리와 어깨를 낮춘 자세에서 상체 움직임으로 상대의 펀치를 흘리거나 막고 거리를 좁히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일단 타이슨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면 대부분 상대들은 당황하기 일쑤였다. 워낙 펀치가 강한지라 같이 받아치기보다 가드를 굳히고 벗어나기 바빴다. 타이슨은 그러한 상대의 움직임을 냉철히 보면서 가드빈틈에 빠르고 정확한 펀치를 꽂거나 공격이 나오는 순간 무시무시한 카운터를 날렸다.

포먼이 우월한 체구를 살려 짧고 묵직하게 펀치를 날리는 것과 달리 단신의 타이슨은 허리회전을 이용해 몸통 전체로 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지켜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시원시원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워낙 스탭이 빠르고 머리 움직임이 좋았던지라 어지간해서는 잔펀치조차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때리기는 까다롭고 한 대 잘못 맞으면 큰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라 많은 상대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몸 움직임을 평소처럼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헤비급 펀치를 가지고 라이트급 선수처럼 움직인다'는 평가가 타이슨에게 붙었던 이유다. 그야말로 전성기 때만 놓고 보면 역대 최고의 인파이터형 복서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선수였다.

그러한 괴물같은 한창 때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슨은 전문가나 복싱 마니아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박한편이다. 전성기가 짧았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말년에 홀리필드에게 너무 당한 것도 저평가의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조금만 성실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복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슨은 여전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복서 중 한명이다. 그에게 절망을 안겼던 홀리필드를 비롯 쟁쟁한 레전드급 헤비급 전설들은 잘 몰라도 타이슨을 모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름값, 유명세만 따진다면 알리와 쌍벽을 이룬 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흉내내기조차 힘든 타이슨만의 고유한 색깔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은 체구로 큰 선수들을 때려눕히며 누구보다도 화끈한 전성기 시절을 보낸 것을 비롯 성장 배경, 굴곡 많은 인생, 악동행보 등 자신만의 다양한 스토리가 잘 어우러져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각인을 남겼다.

그런 상황에서 각종 행사나 이벤트는 물론 영화나 방송 쪽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많은 팬들은 타이슨이라는 희대의 인물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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