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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끝났다. 가장 큰 이유라면 시대적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그 역할을 찾는 노력은 고사하고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그간의 부흥은 그저 시대를 잘 만난 운으로,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호시절을 보냈을 뿐이기에, 몰락은 필연이고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부흥의 요인을 되짚어 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조선의 국운이 쇠락하던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온 26세의 토마스 선교사가 첫 씨앗을 뿌린 구한말 시대의 기독교는 그 자체가 사회 개혁이었다. 양반과 상민도 아닌 노비를 비롯한 천민도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칭하며 대등하게 대우하는 것만으로도 수백 년 내려온 유교 사회와 신분제를 뒤흔드는 것이고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금지했고 기독교인을 박해했으며 이를 빌미로 선교사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병인양요를 겪었다. 결국 프랑스, 미국 등 서양도 아닌 이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몰고 온 운요호사건을 통해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신분제가 철폐되기까지 그 불씨는 기독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의료시설을 갖춘 제중원 건립을 이끈 것도 미국의 선교사였고 이것을 선교 헌금으로 다시 짓고 기부자 이름을 붙여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여성들에게 최초로 교육의 문을 연 이화학당을 비롯한 근대 교육의 시작도 기독교의 혜택이었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기독교 공동체가 민족의 계몽과 저항을 도모하는 도피처이자 훈련소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맞이한 본격적인 산업 근대화 시기에 기독교가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잘살아 보세'로 모든 가치가 집중되고 매몰되던 시절, 남편들은 산업 현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두둑한 월급봉투를 전해줬지만 부인들은 딱히 여가활동이 없었다.

골프나 해외여행은 아직 시작이 안된 시기였고, 그렇다고 춤을 배우러 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비도덕적으로 보였다. 카바레에서 제비족과 춤바람이 난 부인네들을 지탄하는 뉴스가 종종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저 TV, 냉장고, 세탁기, 전축, 피아노 등의 살림을 장만하는 것이 최고의 여가활동이자 기쁨이었다.

이때 교회는 시대가 필요로 했던 지역문화센터였고 여성커뮤니티 단체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간 후의 공허함을 이웃 아줌마들과 함께 교회에 모여 채울 수 있었다. 성경을 통해 중동 지역의 역사도 배우고, 자녀들을 훈육할 때 써먹을 만한 점잖은 문장도 익힐 수 있었다. 피아노와 기타 반주를 곁들여 목청껏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교회 공간을 활용해 꽃꽂이나 악기도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가정방문예배를 통해서는 하나씩 늘어난 집안 살림들을 자연스레 자랑하며 정보를 나누는 친목의 장마저 되었으니, 이에 푹 빠진 부인네들의 손에 이끌려 남편들과 아이들도 교회에 등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또한, 청춘 남녀들에게는 교회만 한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가 없었다. 친절하고 세련된 매너와 남녀 간의 자연스런 대화, 스킨십은 모두 교회 활동 가운데 배우고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당시엔 남녀공학도 극히 드물었고, 설령 남녀 공학이었다고 해도 학교는 물론 그 어떤 단체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해낼 곳은 없었다.

게다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대적 사명에도 교회는 충실했다. 양심선언을 하는 것도 교회나 성당이었고, 수배된 민주투사들의 도피처도 같은 곳이었다. 이런 긍정적이고 시대적인 역할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물론 신사참배 등의 친일,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만행, 사이비 교주들의 엽기적인 행태, 독재정권 찬양 등 부정적인 역사도 분명히 있었지만, 전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억될 한국 기독교의 부흥엔 긍정적인 면이 훨씬 더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의 역할이 없다. 근면, 자조, 협동으로 '잘살아보세'의 새마을 운동 시절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살후 3:10)'는 교리는 정권에도 대중에게도 의미가 있었지만, 이젠 일하고 싶어도 직업을 구하기 힘들고, 연애 상대를 구하러 오프라인 모임에 가서 직접 만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

기독교의 교리에 시대적 사명을 반영한 감동적인 강연은 목사님이 아니어도 유익하고 재밌는 강연회가 넘치고 아예 강연회에 가지 않고 스마트폰으로도 들을 수 있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소속감과 우의를 나눴던 지역공동체 모임은 이미 집들이 문화도 없어진 마당에 그저 어색하고 부담되기만 하다.

교회 경영도 이젠 걱정이다. 호시절에 늘어난 신학대학에서 매년 배출되는 직업 목사들이 더 이상 교회를 설립할 여건이 안 된다. 행여 그랬다간, 가뜩이나 형편이 어려워지는 기존 교회가 타격을 입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늘어나는 것은 해외선교사들이다. 기존 교회들은 애써 관대하게 해외선교활동을 장려하고 후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해외선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교회가 참으로 전략이나 공동체 의식이 없다고 느낀다. 세계화와 인터넷의 발달로 전 세계의 상황과 정보가 모두 공개되는 시대에 한 나라에도 수십 개의 교회에서 선교활동을 제각각 벌이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다른 종교활동 자체가 불법인데 거기서 그렇게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본 적이 없다. 자녀들은 국제학교에 보내서 현지말 대신 영어를 배우고 있고, 심지어는 미국이나 영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도 있다.

교단의 역할이 살아있다면 우후죽순 난립한 선교인력과 자원을 통합해서 차라리 학교나 병원을 크게 지어 세브란스 병원이나 이화여대, 연세대처럼 지속적인 도움이 되는 플랫폼이 될텐데, 그저 선교헌금을 모으고 얼마나 많은 곳에 파견했다를 알리는 수준이 변하지 않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무능이거나 교인들의 수준을 망각한 묻지마식 경영으로 보인다.

종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민중의 삶과 정신을 보듬고 이끌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공생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말기는 불교의 폐단이 심각했기에, 이러한 이유로 조선 건국부터 숭유억불이 국시가 되었던 것이고, 그렇게 안착한 유교가 구한말에는 사대주의와 신분제의 폐해로 쌓여 근대사회로의 변화에 뒤처져 조선의 멸망을 이끈 원인이 된 역사는 기독교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대적 흐름과 이에 따른 역할을 인식하기는커녕,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단하고 허망한 민중의 맘을 얻기는커녕, 스스로 권력을 얻거나 조종하고자 나선다면 몰락을 가속화할 다름이다. 민주화에 기여하며 중흥기를 이뤘던 성공의 추억이 잠재되어, 이젠 직선제와 단임제, 심지어는 탄핵까지도 국민의 손으로 법에 의해 시행되는 21세기에 독재 타도를 목사들이 거리에서 외친다면, 정권이 바뀔 시점마다 정권을 창출하려는 무리의 홍위병을 자처하는 정치 세력일뿐이다.

물론 일부의 일탈이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기독교 자체적으로 이들을 제어할 리더십이나 시스템도 사실상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는 어쩌면 고려말의 불교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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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선수협의회 제1회 명예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전임강사 <저서>면접잔혹사(2012), 아프니까 격투기다(2012),사이버공간에서만난아버지(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