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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이 북한 어선의 삼척항(정동진 남쪽) 출현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것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9·19 남북군사합의로 인한 경계 소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20일 의원총회에서 "9·19 남북군사합의가 이뤄졌을 때부터 예견된 상황 아니었나?"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군사합의와 연결지었다. 뒤이어, 김현아 원내대변인은 22일 논평에서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말을 인용한 뒤, 이번 일에 군경뿐 아니라 청와대도 책임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화는 안보를 희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 정권의 평화 구걸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망치고 있다. 비준 동의도 거치지 않은 9·19 남북군사합의를 즉각 폐기하고, 경계에 실패한 국방부 장관은 당장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 바란다."
  
21일의 한국당 의원총회에 초청된 박휘락 국민대 교수는 "9·19 군사합의는 해안 포문 폐쇄 및 정찰 활동을 제한하는 등에 관한 내용이지, 해상 경계 활동을 금지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번 일은) 9·19 남북군사합의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북한 선박을 발견하지 못한 원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의 설명은 '쇠 귀에 경 읽기'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발표 도중에 한국당 의원들이 항의를 제기했고, 박 교수는 "제 의견이 그렇다"며 발표를 이어가야 했다. 한국당 의원들은 '북한 어선 사태=9·19 군사합의 문제'라는 당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발생했던 '해상 침투' 사례들

이번 사건을 9·19 군사합의의 직접적 결과로 규정하는 한국당의 태도는 지난 수십 년간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벌어진 숱한 일들을 고려하지 않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주한미군과 국군·경찰이 철통 같은 경계를 펴는 속에서도 해상 경계가 이따금 뚫리곤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9·19 군사합의는 물론이고 6·15 남북공동선언도 없었던 시절, 남한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것 중에 무장공비란 용어가 있었다. 무장공비 상당수는 해상을 통해 침투했다. 동해안은 이들의 해상 침투에 수없이 뚫리곤 했다. 고도의 남북 대치 상황에서도 '방패'가 종종 뚫리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처럼 국방부가 호된 질타를 받은 일들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에도 그랬다. 이때는 6·15 공동선언이 채택되기 2년 전이었다. 이 해 6월 22일, 공작원들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강원도 해안에 상륙했다. 이때 군과 국방부는 잠수정의 해안 상륙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책임을 모면하고자 진상을 은폐한 게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그해 7월 15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사건 초기에 국방부는 "북한 잠수정의 승조원은 9명이며, 이 중 3명이 드보크(장비 매설지) 설치를 위해 침투했다가 전원 복귀했으며 잔류 인원은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발표 뒤에 북한 공작원의 시신이 발견됐다. 공작원들이 전원 복귀했다는 발표와 상치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삼척시보다 북쪽이고 정동진보다 남쪽인 동해시 묵호동 앞바다에서 시신이 발견된 뒤 "실제 승조원은 11명이며, 이 중 5명이 침투했다가 2명이 해안에 상륙하고 나머지 3명만 잠수함에 복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이 군 고위 관계자를 통해 언론에 흘러갔다. 이 때문에 국방부는 '경계 실패 책임을 피하고자 진상을 은폐한 게 아니냐?'는 질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98년 7월 15일자 <경향신문>.
 1998년 7월 15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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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에 있었다. 이번 북한 어선 사건보다 훨씬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해 9월 15일 밤, 약 20명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동해·삼척·정동진보다 북쪽인 강릉 해안에 공작원 3명을 내려줬다. 이틀 뒤인 17일 밤, 그 3명을 데려가려고 잠수함이 다시 나타났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군경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17일 밤에 재출현한 잠수함이 임무를 마치고 무사 귀환했다면, 국방부는 아무런 욕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3명을 태우려고 해안가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잠수정이 기관 고장을 일으켜 암초에 부딪히면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잠수정이 파손되자 승조원 전원이 상륙해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금의 국방부보다 훨씬 많은 비판을 당시의 국방부가 받아야 했다.

북한 잠수정의 좌초를 최초 목격한 사람은 해안 경계병이 아니었다. 해안가를 지나가던 택시 운전사 이진규 씨였다. 그는 18일 새벽에 현장을 발견하고 1시 35분에 신고했다. 해안 초소의 소대장이 상부에 보고한 시각은 새벽 2시였다. 2시 약간 전에 해안 초병이 발견하고 소대장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경계병보다 먼저 잠수정을 발견했으니, 군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포된 공비 이광수의 진술에 따르면, 15일 밤에 공작원 3명이 잠수함에서 내린 곳은 국군 초소에서 200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경계병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군의 경계 태세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방부 발표의 진실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1996년 9월 21일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19일 오전 10시 10분에 있었던 무장공비들과의 첫 교전 뒤에, '군경수색대가 공비 3명을 사살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하지만, 이들 3명이 사살된 게 아니라 자살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오면서, 의도적인 허위 발표가 아니었느냐는 의혹도 나왔다.

발표는 '3명은 사살되고, 11명은 집단 자살했다'에서 '11명도 AK 소총에 의해 사살된 것 같다'로 수정됐다. 공작원 내의 누군가가 AK 소총으로 나머지 생존자들을 죽인 것 같다는 쪽으로 발표가 바뀐 것이다. 이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군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사건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선 원인 제대로 봐야
 
 1996년 9월 21일자 <매일경제>.
 1996년 9월 21일자 <매일경제>.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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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와 군을 좀더 난처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북한 잠수정이 출현한 시점이 해군의 대(對)잠수함 훈련 기간이었던 것이다. 위의 <매일경제>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래의 '이(李)'는 이광수를 지칭한다.
 
"李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북한 잠수함은 우리 해군이 16일부터 사흘 동안 강릉과 동해시 인근 해역에서 구축함 등을 동원, 대잠수함 훈련을 실시하던 중에 동해에 침투한 셈이어서, 군의 훈련 내용과 경계 태세에 허점이 있음을 반증한다."
 
16일부터 18일까지 강릉과 동해시 인근에서 북한 잠수함의 침투에 대비한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훈련 개시 전날인 15일 밤에 북한 잠수정이 1차로 출현했다가 훈련 기간 중인 17일 밤에 2차로 출현했으니, 물론 밤중의 출현이기는 하지만 해군의 대잠수함 훈련을 무색케 할 만했다.

위 기사에서 '이의 증언이 사실이라면'이라는 부분은 실상은 불필요하다. 국방부와 군의 심기를 고려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택시 운전사가 잠수정 침몰 사실을 신고한 시점과 해안 초병이 소대장에게 보고한 시점은 훈련 기간 중인 18일 새벽 1시 35분에서 2시 이전이었다.

대잠수함 훈련 기간 중에 북한 잠수정이 출현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광수의 진술이 아니더라도, 택시 운전사와 초병의 진술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국방부와 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의 증언이 사실이라면'이란 부분을 넣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국방부와 군의 심기를 염려하면서도, 군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라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렇게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라도 지적해야 할 정도로 군의 실수가 중대했던 것이다.

위의 두 사건은 9·19 합의는 물론 6·15 공동선언도 없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된 뒤이기는 하지만, 1993년 제1차 북·미 핵위기 발생으로 인해 기본합의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에 벌어진 일이다. 남북 간의 교류·협력을 보장하는 실질적 합의가 없던 시절이라 남북 간의 긴장이 지금보다 훨씬 높을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도 동해의 해상경계가 허술하게 뚫리곤 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 어선 사건을 9·19 남북군사합의 탓으로 돌리는 자유한국당의 태도는, 이번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기보다는 차제에 한반도 평화 국면에 찬물을 끼얹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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