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20만 관객이 찾던 거창국제연극제 전성기 때의 모습

15만~20만 관객이 찾던 거창국제연극제 전성기 때의 모습 ⓒ 거창연극제


30년 역사의 '거창국제연극제'가 지난 수년 간 이어진 파행을 극복하지 못하고 올해 행사(31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됐다. '상표권 구입'을 놓고 대립하던 거창군과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거창국제연극제집행위)가 소송에 돌입하면서다.

거창연극제 중단의 표면적 이유는 '상표권 문제'에 있다. 수 년 동안 예산 지원을 못 받아 어려움이 컸던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는 지난해 12월 상표권을 매입해 직접 운영하겠다는 거창군의 방침에 동의했다. 양측은 각각 감정 평가팀를 구성하고 그 중간 값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양측의 평가 가격이 큰 차이를 보인 데 있다. 거창군 평가팀은 연극제의 가치를 11억으로 평가한 반면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 평가팀은 26억으로 산정했다. 계약대로라면 18억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거창군이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 측의 평가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재평가를 요구했고,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 측은 합의서 준수를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관련기사: "해약하면 20배 배상"? 거창국제연극제 상표권 협상 '논란' http://omn.kr/1jm0z).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던 가운데, 지난 5월 말 거창연극제 측이 합의서를 준수하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시작된 거창연극제 파행

거창연극제 파행 운영은 지난 201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연극제를 오래 이끌어온 이종일 집행위원장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경남예총 회장으로 있을 당시, 보조금을 반환하지 않고 운영비로 쓴 혐의로 기소돼 벌금형을 받으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집행위원장 측은 보조금을 일반 경비로 사용한 것에 자신들이 관여하지 않아 업무상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2014년 새 집행위원장에 연극과는 관련이 없는 군수 출신 인사가 거창군과의 협의를 거쳐 추대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2014년 문체부는 거창연극제를 대표 지역축제로 선정하고 4억 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연극에 전문성이 없는 집행위원장이 재임하는 2년 동안 거창연극제는 평가 최하 등급인 F를 받았고, 이로 인해 지원금도 삭감됐다.

이 과정에서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고소 고발전이 이어졌다. 문제 해결을 놓고도 연극제를 개최해 온 연극인들과 거창군이 중심이 된 거창국제연극제 운영위원회가 대립했다. 결국 2016년 거창군은 예산을 지원하지 않았고, 거창군의회는 군청의 주관 하에 연극제를 개최한다는 조건으로 예산을 승인했다. 이에 연극인들이 반발하면서 이후 3년간 연극제는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사를 이어갔다.

2017년에는 군청에서 같은 이름의 행사를 직접 주관하면서 두 개의 연극제가 동시에 열렸다. 그러나 상표권 문제가 걸리면서 거창군 주최 연극제는 법원의 판결로 개막 한 달을 앞두고 '거창한 여름연극제'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거창군 측은 행사를 군청이 주관해야 하는 이유로 거창연극제 측이 2008년부터 보조금 유용과 감사원 감사를 통해 고발된 점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 측은 "감사와 수사가 이어졌지만 무혐의 처분이 났고, 법적 처벌을 받은 게 없다"고 일축했다. 또 "정작 보조금 집행에 문제가 있었다면 관리감독을 책임 진 군청 담당직원들도 징계를 받았어야 했는데 훈계 수준에 불과했고, 이듬해에는 승진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보조금 문제에 대해서도 "거창군에 연극제의 재정을 직접 관리하든가 공무원 파견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그동안 지원 없이 연극제를 운영하면서 누적된 부채가 약 13억 원가량 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며 "(상표권 판매 금액 중) 누적 적자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지역의 문화발전을 위해 전액 사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축소된 규모로 열렸던 거창연극제

지난해 축소된 규모로 열렸던 거창연극제 ⓒ 거창연극제


거창군은 "거창연극제의 감정 평가 금액이 과도하다"며 소송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거창군의회는 상호합의 계약서 작성에 관여한 군청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분위기다. 최근 열린 행정사무감사에서는 거창연극제 상표권 계약과 관련해 책임 소재를 묻는 신경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번 상표권 매입에 대한 지역 시민단체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지난 7일에는 함께하는거창 등 시민단체들이 거청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거창군의 예산을 집행하는데 군민 여론을 수렴하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행정을 강행하였다"라며 상표권 매입을 철회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관련기사: 거창국제연극제 상표권 분쟁, 시민단체 '계약 파기' 촉구).

결국 주민과 관객들만 피해 봐

현재 양측은 '상표권 문제'로 대립하고 있지만 근본적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문화행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영화제나 연극제, 음악제 등을 지역의 고유한 문화로 만들 생각이라면, 몇 십 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공공지원 정책 시행 기준 중 하나인 '팔 길이 원칙'이 강조되기도 한다.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는 뜻을 담은 '팔 길이 원칙'은 공공에서 지원은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애초 25년 넘게 잘 지속돼 온 거창연극제가 삐걱대기 시작한 건 이 '팔 길이 원칙'이 조금씩 깨지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양측이 굳이 상표권을 사고 팔 필요 없이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고 예산의 투명한 집행이 되도록 관리 감독을 철저하게 했으면, 지금과 같은 안타까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창군이 봤을 때 거창연극제 행사 진행에 문제가 있다면 쇄신방안을 요구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결국 이번 일로 인해 30년 된 연극제는 막을 내리는 모양새가 됐다. 또 거창 군민들과 수십 년 동안 거창연극제를 찾았던 관객들만 피해를 보게 생겼다. 향후 법정 소송 결과에 따라 상표권을 매입해 군청이 주관할 수는 있겠으나, 간판만 같을 뿐 요리사가 바뀐 음식점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옛 위상의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거창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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