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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종착역, 융합의 땅 터키

문자 그대로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도시 이스탄불. 흑해와 마르마라해가 이어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경계로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다. 유럽연합 후보국인 터키 전체를 유럽으로 볼 수도 있고, 더 동쪽인 캅카스 지역까지 유럽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오랫동안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 갈라타 다리에서 바라본 모스크 전경.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 갈라타 다리에서 바라본 모스크 전경.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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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동안 동로마 정교회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고, 이후 500년 동안 이슬람교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곳. 중국 장안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와 파리에서 출발하는 오리엔트특급열차의 종착역. 1800만 인구의 거대도시답게 사기와 위험을 조심하라는 경고도 많았다. 묵직한 이력들 때문에 도시로 들어서는 마음이 특별했다.

1461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 때부터 550년 넘게 이어져 온 그랜드 바자(큰 시장)에는 한국의 깻잎과 비슷한 반찬, 강정과 같은 맛의 과자를 팔았다. 군밤과 군옥수수 노점도 흔했다. 세계는 넓고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언덕이 많고 노을이 고운 도시에서 1일 1케밥 슈왈라를 먹으며 닷새 동안 도보로 여행한 뒤, 북마케도니아 호스텔에서 함께 일한 동료 할릿의 고향, '오래된 도시'라는 뜻의 에스키셰히르로 이동했다.

할릿은 동유럽 여행 중이었지만 그의 여자친구 멜리사의 소개로 아파트 앞집 친구 무스타파의 소파에서 이틀을 지낼 수 있었다. 무스타파는 청소년기에 터키로 유학을 온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 대학 졸업 후 피자가게 운영을 준비 중이었다.

내가 배운 첫 번째 아프가니스탄 말은 '마나나'이다. '바나나'와 비슷해 외우기 쉬운 이 말은 '고맙다'는 뜻이다. 어떤 나라에 가든 주로 이 말을 제일 먼저 배우고 가장 많이 말하게 된다.

"마나나! 무스타파, 멜리사, 할릿!"

아름다운 말(馬)들의 땅 카파도키아

기이한 지형 위로 떠오르는 알록달록 열기구로 유명한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는 페르시아 말로 '아름다운 말들이 사는 땅'을 뜻한다. 삼백만 년 전 폭발한 에르시예스 화산의 재가 굳어 부드러운 응회암 지대가 만들어졌고, 그곳에 굴을 파고 살던 사람들이 수많은 지하도시와 동굴 교회를 남겼다. 일인당 200달러가 넘는다는 열기구를 타지는 못해도 보고는 싶었는데, 머무는 5일 내내 비와 눈이 내려 열기구는 뜨지 않았다.
 
기이한 지형 위로 떠오르는 알록달록 열기구. 날씨가 흐리면 뜨지 않아서, 떠나는 날 아침에야 잠시 볼 수 있었다.
 기이한 지형 위로 떠오르는 알록달록 열기구. 날씨가 흐리면 뜨지 않아서, 떠나는 날 아침에야 잠시 볼 수 있었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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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날 아침, 숙소 창밖으로 언뜻 풍선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열기구가 뜬 것이다. 맑은 하늘에 수백 개의 풍선들. 하지만 풍선들은 속속 땅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날씨만 좋으면 종일 뜨는 줄 알았는데 열기구는 동틀녘 한 시간 동안에 한꺼번에 떴다 내려오는 것이었다.

터키 동부 반호수로 가는 기차는 일주일에 두 대 뿐이라 하루 더 머물 수도 없었다. 게다가 하늘은 다시 흐려지고 있었고 숙소 주인은 이윤이 적다고 말하며 갑자기 도미토리 가격을 5유로에서 8유로로 올렸다. 아쉬움을 안고 떠날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그 유명한 풍선들을 봤으니 기적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카파도키아의 도시 카이세리 기차역에서 헝가리에서 만난 한국인 가족을 다시 만났다. 짜이(차) 한 잔을 마시며 한 시간 남짓, 편안한 모국어로 두런두런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멀어져 가는 가족을 보며,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인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카이세리에서 터키 최대의 호수 반(Van)까지, 횡단 열차를 타고 열일곱 시간이 걸렸다. 불편한 좌석에서도 허리를 깊이 숙여 기도를 올리는 옆자리 승객을 보며, 해질녘 서글퍼지는 내 마음을 다독였다.

한밤중에 기차가 갑자기 멈춰서 놀랐는데 뒷자리 청년이 스마트폰으로 영어 단어를 찾더니 '철도 업그레이드 공사'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공사 거리는 무려 200킬로미터, 다행히 무료 버스가 신속하게 연결되어 몇 시간 뒤 다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의 하룻밤

터키 동부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와 닿아 있다. 반 호수와 가까운 아르메니아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오랜 인종, 종교 분쟁으로 인해 국경이 모두 막혀 있었다.

군인들의 검문도 매시간 이어졌다. 하는 수 없이 북쪽의 조지아로 방향을 틀었다. 반에서 열두 시간 거리 조지아 국경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 저녁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예정에 없던 터미널 노숙을 하고 아침 버스를 타기로 했다.

저녁 여덟 시경, 마흔 명 남짓 사람들이 터미널로 몰려왔다. 절반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손에 든 비닐에는 빵 한 조각과 물 한 병이 들어 있었다. 터키에는 350만 명의 난민이 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물과 빵 이외의 지원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남성들이 이스탄불로 가는 티켓을 구하기 위해 신분증을 확인하고 매표원, 경찰들과 한참 승강이를 하는 와중에 여성들과 아이들은 너무나 익숙하게, 터미널 벤치와 맨바닥에 툭 베개를 놓고는 몸을 뉘였다. 많이 지쳤는지 아이들은 곧 잠이 들었는데 한 아이가 자꾸만 울었다. 아빠는 매표소에 있고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소년이 아이에게 다가가 주스 컵을 내밀며 등을 토닥여 달랬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작은 입으로 꿀꺽꿀꺽 단번에 주스를 들이켰다. 소년의 엄마는 다시 주스를 따라 나에게 권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나눠 주었다.

소년의 가족은 파키스탄 사람들로 터키에 사는 친척에게 간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아프가니스탄 난민이었다. 일곱 살 소년이 세 살 아이를 달래고, 조금이나마 사정이 나은 파키스탄 가족이 더 어려운 아프가니스탄 가족들을 도왔다.
 
터키 동부 반 Van 터미널. 세 살 아이에게 주스를 먹이며 달래는 일곱 살 아이.
 터키 동부 반 Van 터미널. 세 살 아이에게 주스를 먹이며 달래는 일곱 살 아이.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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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을 살 돈도 잘 곳도 없어 터미널에서 며칠이고 이동할 기회를 기다리며 지내는 난민들도 많았다. 얘기를 나눠 보면 모두들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또 짐을 잃어버릴까 봐 불안했지만 피곤했는지 벤치에 눕자 곧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잠이 깨 터미널을 둘러보니 친절한 파키스탄 가족과 아프가니스탄 가족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티켓 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막막한 난민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어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버스를 탔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친구가 쓴 문장이 마음을 쳤다. 말 한마디 글 한 줄도 조심스럽다.

나는 나의 이기적이고 소심하고 찌질한 모습을 잘 안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자고, 슬퍼하고 뉘우치지만 습관과 성격은 잘 바뀌지 않는다. 여행에서의 새로운 만남과 고민들이 정말 조금이라도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여행이 아니라 결국 내가 만들어야 하는 변화다.
 
터키 동부 반 Van 터미널. 바닥과 벤치에 베개를 놓고 누워 잠을 자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터키 동부 반 Van 터미널. 바닥과 벤치에 베개를 놓고 누워 잠을 자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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캅카스 남부, 조지아에서의 일주일

캅카스 지역 남서부에 자리한 조지아는 비자 없이 360일 체류가 가능하고 숙소비가 저렴해 장기 여행자들이 많은 나라다. 아름다운 수도 트빌리시의 하루 5라리(한화 2100원) 가격 숙소에서,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러시아 여행자들과 일주일을 지냈다. 호스텔 주인은 요르단 사람, 관리자는 러시아 여행자였다. 이란 사람은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페르시아가 이란인 줄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스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도, 조지아에서 오늘 만난 대학생들도 '독일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독일로 가고 싶어 하는 건가요?"

숙소에서 만난 독일 여행자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왜 굳이 독일로 오려고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 사실 독일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그들이 바라는 일자리도 거의 없어."

그들이 찾는 건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국에서 위협 당하는 목숨의 안전을 찾아서, 또는 일자리, 교육, 삶의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독일로, 서유럽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서유럽에서도 난민들과 이주민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조지아에서 이스탄불까지 스물일곱 시간의 버스 여행. 육로 이동은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지만, 때로는 너무나 좀이 쑤시고 힘들다. 내 앞자리에는 한 살 배기 아기와 엄마가 앉아 있었다.

여비를 아껴 쓰다 보면 떠날 무렵 돈이 이삼만 원 남는다. 비싼 식당 한 번, 좋은 숙소 하루 묵으면 끝나는 돈이지만 그러지 않는다. 대신 '오랜만의 사치'로 20리라(4000원)를 내고 이스탄불 해협의 페리를 탔다.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의 기운을 느끼며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보았다. 남은 리라는 결국 수수료 적은 환전소를 찾아 달러로 재환전했다. 25달러, 딱 이집트 입국 비자 가격이었다.


태그:#모이, #세계일주, #아프가니스탄난민, #조지아,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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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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