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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매년 유월이 시작되면 엄마는 햇마늘을 주문한다. 집에 도착한 '산지직송'이라 적힌 상자를 열어보면 빨간망에 마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엄마는 그 망에서 마늘을 꺼내 베란다 천장에 걸려있는 빨래건조대에 하나하나 걸었다. 유월에 입는 티셔츠에는 마늘 냄새가 났다.

그렇게 며칠을 햇볕에 말리고 나면 신문지 위에 마늘을 잔뜩 쌓아놓고 껍질을 하나하나 벗긴다. 엄마에게 마트에서 돈 주고 사는 깐마늘과 간마늘은 없다.

직접 일일이 껍질을 벗겨내 하얗게 만들고, 작은 절구에 넣은 후 찧어 노랗게 만든다. 하얀 통마늘은 간장을 부어 장아찌를 만들고, 노란 다진 마늘은 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얼려 둔다. 유월 엄마의 손가락에서도 늘 마늘 냄새가 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는 베란다에서 마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마늘 손질을 하고 있던 엄마. 나는 둥근 엄마의 등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뭐 하고 싶어?"
"뭘 뭐하고 싶어!"


엄마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지 그저 웃으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한다.

"아니. 엄마 생각해 봐! 다시 젊게 태어나면 엄마 뭐 해보고 싶은지!"
"뭐 하고 싶냐고? 암~ 것도 안 하고 싶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대답하는 순간에도 바쁘게 마늘을 찧고 있는 엄마.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고 싶으신 걸까. 나는 한 번 더 물어본다.

"왜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 하고 싶은 거 없어?"
"음... 돈 벌고 싶어!"
"돈 벌고 싶어? 돈 벌어서 뭐 하려고?"
"돈 벌어서 밥 먹어야지! 먹고 살라믄 벌어야지!"


평생 가사노동을 했는데, 가사노동 말고 뭘 하고 싶냐 물으니 그냥 노동을 하겠다는 엄마. 생각해 보니 그 대답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참 엄마답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그럼 뭐해서 돈 벌고 싶어?"
"뭐해서? 음... 회사 다닐까? 아니면 공장 다닐까?"


엄마에게 돈은 회사를 다니거나 공장을 다녀야만 벌 수 있는 것. 그래서 그렇게도 내가 회사에 취직하길 바라셨던 것일까. 차마 딸에게 공장에 다니라는 말은 못해 회사를 다녀라 말씀하셨던 것일까. 회사와 공장. 나는 엄마의 선택이 두 개라서, 엄마가 알고 있는 단어가 그 두 개라서,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니 아빠가 평생 돈 벌었으니까... 다음에는 내가 벌어야지..."

아! 엄마... 엄마의 그 말 한마디에 이번에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빠 아니면 딸. 나는 엄마의 생각이 두 개라서, 엄마의 생각이 아빠와 딸 뿐이라서, 그 속에 엄마 자신은 없어서, 마음이 한 번 더 세 갈래로 갈라진다.

엄마가 가사노동을 하는 이유도 아빠와 딸 때문이고, 엄마가 노동을 하겠다는 이유도 남편과 자식 때문이다. 왜 엄마의 모든 동기와 명분은 그 둘에 한정되어 있을까. 나는 엄마가 한번이라도 자기가 먹고 싶어 음식을 했으면 좋겠고, 자기가 사고 싶어 돈을 썼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하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 40년을 넘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온 탓일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시간들에는 아빠와 내가 없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든다.

아빠는 평생 노동을 했고 노동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엄마는 평생 가사노동을 했고 지금도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나는 나만 생각했고 지금도 내가 제일 중요하다. 부모의 노동으로 자라난 자식은, 부모도 노동도 아닌 자신만을 생각한다. 이 모순. 이런 이기심. 그래서 자식은 평생 부모보다 생각도 마음도 좁은 것이다.

엄마는 생각이 아빠와 딸 둘 뿐이었지만, 나는 생각이 나 하나뿐이다. 둘도 못 된다. 그래서 나는 자식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태그:#엄마, #부모,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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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 삶의 면역력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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