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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국가유공자묘역 서울현충원에는 국가유공자묘역이 제1, 제2, 제3 묘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이선근, 백낙준 등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했던 친일파도 다수 안치되어 있다.
▲ 국가유공자묘역 서울현충원에는 국가유공자묘역이 제1, 제2, 제3 묘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이선근, 백낙준 등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했던 친일파도 다수 안치되어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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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묘역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외교·안보·과학 분야에서 국가 발전과 민족 번영을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 총 68위가 안치돼 있다. 제1묘역, 제2묘역, 제3묘역으로 나뉘어 조성돼 있다.

국가유공자묘역은 1983년 10월 9일 전두환의 버마(현 미얀마) 방문을 수행하던 중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사망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17위를 안치하면서 처음 조성됐다.

그런데 이 국가유공자묘역에도 친일파들이 다수 묻혀 있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묻혀 있는 이선근(1905~1983)과 백낙준(1896~1985), 엄민영(1915~1969)과 황종률(1909~1972), 최치환(1923~1987)이 그들이고,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묻혀 있는 안익태(1906~1965)와 조진만(1903~1979)이 그들이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 이선근, 백낙준, 엄민영, 황종률, 최치환
  
이선근의 묘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상무위원과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을 지낸 이선근은 해방 후 문교부장관 등을 지내는데,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있다.
▲ 이선근의 묘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상무위원과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을 지낸 이선근은 해방 후 문교부장관 등을 지내는데,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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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근은 동향인 공진항(개성갑부 공성학의 아들)과 의기투합해 1937년에 일제를 따라 만주로 진출해 자본금 50만 원의 만몽산업(주) 상무이사가 됐다. 만몽산업(주)은 만주에서 재만조선인의 노동력을 활용한 대규모 농장 '안가농장'을 경영했다. 여기서 생산된 쌀은 독립군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던 관동군의 군량미로 제공됐다. 

이선근은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에서도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현 창춘)에 설립된 이 조직은 관동군을 측면 지원하던 조선인 주축의 친일단체였다. 이선근은 잡지 <삼천리>(1940년 12월 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생략) 대동아공영권의 가장 건실한 신(新)질서를 건설해야만 될 것은 유구한 인류역사가 우리에게 부과한 중대 사명으로 (중략)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용감하게 신체제 건설에 희생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중략) 특히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활동은 (중략)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신흥제국(新興帝國)에 있어서 가장 솔직한 자기반성으로 이 운동의 광휘 있는 실천은 장래 선계(鮮系) 국민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반드시 좋은 영향을 가져오리라고 봅니다."

이후 이선근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이 됐다. 만주국 협화회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구현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한 만주지역 최고의 친일단체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백낙준의 묘 기독교인이기도 한 백낙준은  평양·안주·평서 3노회 연합으로 개최된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신도대회에 참석해 ‘총후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하고, 194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애국기헌납기성회에서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 친일반민족행위자 백낙준의 묘 기독교인이기도 한 백낙준은 평양·안주·평서 3노회 연합으로 개최된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신도대회에 참석해 ‘총후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하고, 194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애국기헌납기성회에서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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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은 미국 유학파로 1927년부터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인물인데, 1940년부터 친일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인다.

기독교인이었던 백낙준은 평양·안주·평서 3노회 연합으로 개최된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신도대회에 참석해 '총후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4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애국기헌납기성회에서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 최대의 친일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1942년에는 <기독교신문>에 설교문 '내 아버지의 집'을 실어 "우리에게 병역의 의무를 주심은 천황께옵서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분부이옵니다" "우리는 조국 일본을 결사 수호하고, 황화를 우내에 펴고, 황위를 사해에 떨치옵시다"라고 밝혔다.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적극 칭송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인의 동참을 호소하는 글을 연이어 게재했다.

해방 이후 그는 연세대 총장과 문교부장관을 지냈다.
 
엄민영의 묘 엄민영은 1939년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의 관료를 지낸 인물이다. 1943년부터 임실군수와 무안군수를 지냈다.
▲ 엄민영의 묘 엄민영은 1939년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의 관료를 지낸 인물이다. 1943년부터 임실군수와 무안군수를 지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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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민영은 1939년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조선총독부의 관료를 지냈다. 1943년부터 임실군수와 무안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엄민영은 1960년 4.19혁명 직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전북)에 당선했으며, 5.16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에 이어 내무부장관, 주일대사를 지냈다.
 
황종률의 묘 황종률은 1935년 규수제국대학 법문학부와 1936년 만주국 고위간부 양성기관인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리를 한 인물이다. 1940년에는 조선인 청년조직인 ‘선계자흥회(鮮界自興會)’와 만주국 협화회 사이의 연락간사를 맡았고, 친일조직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 황종률의 묘 황종률은 1935년 규수제국대학 법문학부와 1936년 만주국 고위간부 양성기관인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리를 한 인물이다. 1940년에는 조선인 청년조직인 ‘선계자흥회(鮮界自興會)’와 만주국 협화회 사이의 연락간사를 맡았고, 친일조직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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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률은 1935년 규수제국대학 법문학부와 1936년 만주국 고위간부 양성기관인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리를 한 인물이다. 1940년에는 조선인 청년조직인 '선계자흥회(鮮界自興會)'와 만주국 협화회 사이의 연락간사를 맡았고, 친일조직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간사로 활동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귀국해 연희대학 교수를 지낸 황종률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재무부장관과 체신부장관을 지냈으며,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최치환의 묘 경남 남해 출신의 최치환은 1943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가 패망할 당시 만주국군 중위로 있던 인물이다. 해방이후 경찰이 된 최치환은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에도 토벌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 최치환의 묘 경남 남해 출신의 최치환은 1943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가 패망할 당시 만주국군 중위로 있던 인물이다. 해방이후 경찰이 된 최치환은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에도 토벌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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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 출신인 최치환은 1943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가 패망할 당시 만주국군 중위로 있던 인물이다.

귀국해 1947년 경찰에 투신한 최치환은 제주에서 4.3봉기 직후인 1948년 4월 8일에 서북청년회 회원 200명을 인솔해 제주로 들어가면서 제주 4.3사건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제주에 계엄이 선포되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언급한 직후인 1949년 2월 16일에 제주특별사령부 작전참모로 보임돼 다시 제주 4.3에 직접 개입했다. 1949년 1월 9일 치 미국 <뉴욕타임즈>에 "비상경비대 최치환 작전과장이 오늘(8일) 3척의 소련 잠수함이 4일 전에 남한 근해에 나타나서 공산게릴라들에게 제주도 도청소재지에 공격을 개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금일 발표하였다"라는 보도가 실린 것으로 봤을 때, 그 이전부터 개입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소련잠수함 출현설'은 제주도민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위해 조작된 허위사실이었다.

1956년 34세에 서울특별시 경찰국장에 임명되는 등 경찰 내에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최치환은 1958년에는 대통령 비서관, 4.19혁명 직전에는 공보처장으로 발탁됐다. 4.19혁명 직후인 7월 경남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했으나, 1961년 3월, 3.15 부정선거와 관련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의원직을 상실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6, 7대(민주공화당), 10대(무소속), 12대(한국국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이중 백낙준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됐고, 엄민영과 황종률은 친인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그런 데 반해 이선근과 최치환은 친일 인사임에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

[국가유공자 제2묘역] 안익태와 조진만
 
안익태의 묘 현재 부르는 애국가의 작곡가이기도 한 안익태는 유럽에서 1940년부터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은 물론 독일 나치제국의 제국음악원 총재이자 나치 협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축전곡> 등을 계속 연주하였다.
▲ 안익태의 묘 현재 부르는 애국가의 작곡가이기도 한 안익태는 유럽에서 1940년부터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은 물론 독일 나치제국의 제국음악원 총재이자 나치 협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축전곡> 등을 계속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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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일본 유학과 미국 유학에 이어 주로 유럽에서 활동했는데,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1938년에는 일왕(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하는 <에텐라쿠>를 발표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만주환상곡)를 4개의 악장으로 완성한다.

안익태는 유럽에서 1940년부터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은 물론 독일 나치제국의 제국음악원 총재이자 나치 협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축전곡> 등을 계속 연주했다.

안익태는 최근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책 <안익태 케이스>(삼인)를 펴내면서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15년에도 안익태가 1941년에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한 사실을 밝혀냈던 이해영은 한발 더 나아가 안익태를 일본군국주의는 물론 나치에도 부역한 인물이었다고 문제제기했다. 1943년 괴벨스가 주도해 만든 나치의 나팔수 '음악가 조직' 제국음악원의 정회원이 되기도 했던 안익태의 유럽 활동이 나치의 외곽조직인 독·일협회의 후원을 받아 진행됐다는 것이다. 

조진만은 일제 강점기 부장판사까지 지내면서 독립운동가의 재판에도 관여했던 경력이 있음에도 정부수립 후 법무부장관(1951)과 5.16쿠데타 이후 대법원장(1961)을 지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묻혀있다.

조진만은 1925년 12월 조선인 최초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해주지법에서 판사 업무를 시작했다. 1939년 8월 조선인 최초로 부장판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1928년 11월에는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기도 했으며,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30년 3월에는 고려혁명당 만주총부장으로 활동하던 황욱(일명 황금술)이 징역 5년을 선고받을 때 배석판사로 참여했다.

안익태와 조진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이들이 일제강점기 명백한 친일행위를 했음에도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혀 있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엇갈린 주장이 존재한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은 '이들이 과거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이후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 역시 사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동농 김가진(1846~1922)이 일제강점기인 1919년부터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농 김가진의 경우는 남작 작위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일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를 박차고 오히려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헌신한 경우다. 그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게 마땅함에도 아직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들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일제를 위해 헌신하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야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경우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기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적용 기준은 조금 더 엄격했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경우다. 그들이 대한민국에 기여한 역할은 결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죄'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애국지사묘역에도 친일파들이 묻혀 있었다고?
  
애국지사묘역에 있던 친일파 김홍량의 묘 노태우정권 시절 건설부 차관까지 지낸 김대영은 아버지 ‘김홍량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가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무려 5년을 끈 이 소송은 2015년 3월 30일에 “서훈취소는 정당하다”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이장을 거부하던 김홍량의 후손들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그해 10월에야 이장하였다.
▲ 애국지사묘역에 있던 친일파 김홍량의 묘 노태우정권 시절 건설부 차관까지 지낸 김대영은 아버지 ‘김홍량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가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무려 5년을 끈 이 소송은 2015년 3월 30일에 “서훈취소는 정당하다”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이장을 거부하던 김홍량의 후손들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그해 10월에야 이장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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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5일 대한민국 정부는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 논설로 유명한 언론인 장지연,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을 비롯해 19명(장지연, 윤치영, 김응순, 강영석, 김우현, 김홍량, 남천우, 박성행, 박영희, 유재기, 윤익선, 이동락, 이종욱, 이항발, 임용길, 차상명, 최준모, 최지화, 허영호)의 '친일행위가 확인됐다'면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취소했다. 소송 중이어서 보류됐던 고려대 설립자이자 부통령을 역임한 김성수에 대한 서훈도 2018년에 취소했다.

특히 장지연을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황성신문에 항일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을 실었던 우국지사로 배웠던 사람들에겐 그가 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일제에 협력했던 인물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2011년에 서훈 취소를 당한 19명 중에는 2015년 10월까지 애국지사묘역에 묻혀 있던 김홍량도 포함돼 있었다. 김홍량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1907년부터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안명근의 안악사건에 백범 김구와 함께 연루돼 1911년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다 1915년 11월에 가석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변절해 황해도도회 부의장, 조선임전보국단 황해도 발기인 등으로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조선군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 원을 내는 등 해방 직전까지 친일행위를 했다.

그런 김홍량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이승만이었다. 해방정국에서 대규모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이승만은 김홍량 등을 내세워 대한경제보국회(위원장 이승만)라는 경제인단체와 보국기금실행위원회(위원장 김홍량)를 만들게 해 과거 친일행위에 대한 면책과 새로운 사업기회 마련이 절실했던 친일경제인들로부터 대규모 정치자금을 받아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건설부 차관까지 지낸 김대영은 아버지 '김홍량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가 부당하니 이를 취소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무려 5년을 끈 이 소송은 2015년 3월 30일에 "서훈취소는 정당하다"라는 최종 판결로 종결됐다. 그럼에도 이장을 거부하던 김홍량의 후손들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그해 10월에야 이장했다.

김홍량의 경우와 달리 월정사 주지 출신 친일 승려 이종욱과 고려대의 전신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을 역임한 윤익선의 묘는 2011년 정부의 서훈취소 발표가 나오자마자 애국지사묘역에서 스스로 이장했다.

이에 앞서 1996년에도 정부는 서춘 <매일신보> 주필을 비롯한 5명(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의 서훈을 취소한 바 있다. 이때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혀 있던 서춘의 유족들이 이장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대전지역 시민단체들의 집중 비판을 받은 끝에 2004년에야 겨우 이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친일인사들이 독립유공자로 변신하여 애국지사묘역에 묻히게 된 배경에는 독립유공자 표창을 본격적으로 한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부터 독립유공자 상훈 심사를 한 인물들이 이병도, 신석호, 이선근과 같은 친일인사들이었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고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표창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애국지사묘역에 더 이상의 친일파는 없다?

지난 4월 29일 MBC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혀 있는 송세호가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운영하고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송세호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의친왕 이강을 중국으로 탈출시키려 했던 대동단 활동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밀정으로 전락했고,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까지 운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여러 자료가 나온 것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마냥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또 다시 등장한 셈이다.

애국지사묘역 옆에 있던 정자 '일송정'의 추억, '선구자'의 윤해영과 조두남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남쪽 언덕을 내려가면 아담한 정자 하나가 서 있다.

이 정자의 원래 이름은 '일송정'이었다.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그 일송정을 연상케 하려는 목적이었을 텐데, 실제로 2015년까지는 가곡 '선구자' 노랫말과 함께 작사자 윤해영(1909~?)과 작곡자 조두남(1912~1984)의 이름이 나무패에 새겨져 3년 동안 정자 처마 안쪽에 달려 있었다.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바로 아래의 정자 <일송정> 이곳에는 가곡 <선구자> 노랫말과 윤해영(작사)과 조두남(작곡)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패가 걸려 있었는데, 2015년 지역단체, 민족문제연구소, 연합뉴스 등의 문제제기로 나무패가 철거되었고, 지금은 <일송정> 현판도 없다.
▲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바로 아래의 정자 <일송정> 이곳에는 가곡 <선구자> 노랫말과 윤해영(작사)과 조두남(작곡)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패가 걸려 있었는데, 2015년 지역단체, 민족문제연구소, 연합뉴스 등의 문제제기로 나무패가 철거되었고, 지금은 <일송정> 현판도 없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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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기 전 <선구자> 나무패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아래에 있는 정자 <일송정> 안쪽에는 2015년 11월까지 3년간 친일파 윤해영과 조두남이 작사 작곡한 가곡 <선구자>의 나무패가 걸려 있었다.
▲ 철거되기 전 <선구자> 나무패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아래에 있는 정자 <일송정> 안쪽에는 2015년 11월까지 3년간 친일파 윤해영과 조두남이 작사 작곡한 가곡 <선구자>의 나무패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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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에 등장하는 '말 달리던 선구자'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독립군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한 때 한국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가곡으로 애창되기도 했다. 1991년에는 중국 용정에 '선구자' 노래비가 설치되기도 했다(하지만 '선구자' 노래비는 노래의 유래를 이미 알고 있는 현지 조선족들에 의해 노랫말이 쪼아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조두남과 윤해영은 만주에서 짝을 이뤄 오족협화의 낙토를 찬양하는 '아리랑 만주' 등을 발표했으며, '룡정의 노래'도 1932년에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1944년 '윤해영 작사·조두남 작곡 신작가요 발표회'에서 처음 소개된 노래였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초부터 '선구자'를 작사·작곡한 윤해영과 조두남의 친일행적이 알려지고 '선구자'도 일제의 만주 개척을 칭송하는 '룡정의 노래'의 일부 가사를 바꿔 발표한 노래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제는 라디오 방송에서조차 사라진 노래가 됐다.

이러한 흐름과 정반대로 서울현충원을 관리하는 국방부는 2013년부터 정자 일송정에 '선구자' 나무패를 설치해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동작 지역단체와 민족문제연구소, <연합뉴스> 등의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국방부는 2015년 11월 이를 철거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 탓일까. 이후 어느 시점에 '일송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조차 사라져 버렸다. 아무 죄 없는 정자 '일송정'은 이제 이름 없는 정자로 바뀌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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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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