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지> 포스터

영화 <로지> 포스터 ⓒ BoXoo 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로 기억이 난다. 빗소리가 세차게 들리던 어느 날 밤,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창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잠시 귀 기울여 들어보니 어느 남자가 절규하는 소리였다.

남자는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는데 이를 들어주지 않은 집주인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앞집에 세 들어 살던 가족이 월세가 밀려 이를 참지 못한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 방의 가구를 모두 집 밖에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밤, 비가 와 가구들이 다 비에 젖어버렸고 이에 쫓겨난 가족의 가장이 집주인을 원망하는 소리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필자는 그 가장과는 안면이 없었지만 너무나 냉정한 집주인 아주머니를 비난하며 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그 가족을 걱정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난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그 가족과 비슷한 모습을 아일랜드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로지>인데, 상승한 임대료를 내지 못해 7년간 살던 집에서 쫓겨난 로지네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였다.

극 중 로지 가족은 식당에서 일하는 남편 존(모 던포드)과 아내 로지(사라 그린), 그리고 사춘기인 큰 딸 케일리(엘리 오할로런)와 초등학생인 알피와 밀리, 마지막으로 막내 매디슨까지 여섯 식구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지는 집주인으로부터 집 임대료를 올려달라는 통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를 감당하지 못한 로지네 여섯 식구는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에 큰 짐들은 급한 대로 남동생 집에 맡겨놓고 옷가지들과 생필품을 차에 가득 실은 채 로지는 새집을 구할 때까지 지낼 곳을 찾아 헤맨다. 당장 하룻밤이라도 지낼 곳을 찾지 못하면 길거리에서 밤을 지내야 하기에 급한 로지는 시에서 제공하는 숙박 리스트에 줄을 쳐가며 하루 종일 전화를 건다.

그러나 비슷한 처지의 가족들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전화를 거는 곳마다 거절뿐이다. 이에 로지는 남동생에게 부탁해보려 하지만 남동생은 새로 태어날 아기 때문에 방이 필요하다며 로지 가족의 짐마저 빼달라는 눈치를 준다. 거기다 로지에게 '홈리스'라는 말까지 한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로지는 자신은 홈리스가 아니라 잠시 머물 곳이 없을 뿐이라 항변한다.
 
 영화 <로지> 스틸컷

영화 <로지> 스틸컷 ⓒ BoXoo 엔터테인먼트

  
로지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

로지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사과하면 집에 머물러도 좋다는 말을 하지만 이를 로지는 거절한다. 당장 온 가족이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왜 로지는 이를 거절했을까? 얼핏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로지는 어머니와 몇 년 전 다툼으로 인해 관계가 서먹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선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영화 속 정황들을 두고 생각해보면 된다. 학생 시절 로지는 존을 만나 아기를 낳고 가정을 꾸민다. 이때 그녀는 미성년자였다. 그로 인해 그녀의 부모님들은 크게 반대했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는 더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로지는 그런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와 가정을 꾸리고 학교도 그만둔 채 부모님의 도움 없이 네 아이의 엄마가 된다.

그렇게 부모님과 등진 채 살아가던 로지는 몇 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찾아간다. 아마도 이때 어머니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아 가난한 삶을 사는 로지에 대해 화를 냈을 것이다. 이에 로지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주지 않은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라는 원망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그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진 로지와 어머니는 결국 화해를 하지 못했고, 그렇게 로지는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지낼 처지가 되었음에도 어머니의 도움을 거절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사과하고 집에 들어가면 과거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 있기에 로지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스스로 이 난관을 해결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그럼 로지의 가족이 아니라면 남편 존의 가족들의 도움이라도 받으면 되는데 영화 속엔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존이 고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부모도 형제도 없는 가난한 존이기에 로지의 부모님은 더더욱 반대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집을 잃어버리게 된 로지네 가족이 최선을 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홈리스가 되어 길거리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 모습을 통해 아일랜드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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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제, 우리 중 누군가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영화 <로지> 스틸컷

영화 <로지> 스틸컷 ⓒ BoXoo 엔터테인먼트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라디오방송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현재 아일랜드의 홈리스 문제에 대한 뉴스 보도를 암전된 화면 속에서 아나운서의 내레이션으로 들려준다. 이런 장면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오프닝 장면에서 고용 지원수당 담당자와 통화하는 다니엘의 음성을 암전 속에서 들려주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또한 집을 잃은 홈리스 가족이란 소재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몇 분 늦은 것만으로 복지수당을 받지 못해 굶주려야 했던 케이티 가족을 떠오르게 한다. 이 영화를 만들 때 패디 브레스내치 감독이 켄 로치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이 보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사회복지시스템의 문제를 비판하는 반면 이 영화는 로지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일랜드의 홈리스 문제를 관조적으로 담는 데 그친다.

10년 전 KBS <동행>이란 다큐에서 차 안에서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가족은 몇 년째 차 안에서 생활하며 공중 화장실에서 씻고 자동차 히터 하나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함에도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유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6명의 아이를 보육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의 도움을 요청할 경우 아이들을 보육 시설에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떨어져 지낼 바엔 이렇게라도 함께 있고 싶다는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이에 아버지는 막노동을 통해 여덟 가족의 생계비를 유지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한 미래에 대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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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속 로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현실은 집 없는 홈리스 처지이지만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하룻밤을 지낸 방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빨래를 하지 못해 자신의 아이가 몸에서 냄새가 나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로지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로지는 이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기보단 어떻게 해서든 자기 힘닿는 데까지는 혼자 해결하려 노력한다.
 
 영화 <로지> 스틸컷

영화 <로지> 스틸컷 ⓒ BoXoo 엔터테인먼트

 
이렇듯 10년 전 KBS <동행>에서 보았던 가족의 모습을 1인당 GDP가 우리나라의 두 배인 6만 달러의 아일랜드 영화에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홈리스에 대한 문제는 과거의 문제거나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현시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현택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로지 홈리스 사회복지시스템 패디브레스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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