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연극배우를 꿈꿨던 때를 기억한다. 녹번 레슨포케이아트 연습실에서 나는 <인형의 집>을, 대학로 르미에르 극장에서 <유령>을, 그리고 명동 예술극장에서 <벚꽃동산>을 공연했다.
나름 역할도 꽤 비중 있었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는 아내 노라를 자신의 소유물로 두려는 은행장 남편인 '헬메르'였고, <유령>에서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얻은 발작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오스왈드'였으며, <벚꽃동산>에서는 제정 러시아 말기 무렵 노예에서 신흥자본 세력가로 신분 상승한 '로빠힌'이었다.
당시 신학생이자, 교회 전도사던 내게 연극 무대는 '또 다른 나라'여서, 수업을 마치고 연습실로 가는 길이 마치 다른 나라로 여행 가는 것처럼 설레고 짜릿했다. '교회'와 '연극', 두 나라를 자주 오가며 여행하던 나는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언제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 어느 한쪽 나라를 택해서 살아야 할 때가 올 텐데. 그때, 나는 무슨 나라를 택할까. 내게 어느 나라가 잘 어울릴까.
연극 <어나더 컨트리>를 보고, 내 6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시대, 그리고 학교와 불화하는 인물
▲ 연극 <어나더 컨트리> 캐스팅 ⓒ PAGE 1, PlayDB
연극 <어나더 컨트리>(5월 21일~8월 11일)는 1930년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상류층 자녀들만 모인다는 명문 공립학교의 개스코인 기숙사에서 많은 학생들은 '트웬티투'(학생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거나, '프리펙트'(기숙사 선도부)가 되고자 한다. 한 번 그런 자리에 올라가면, 사회에서도 출세의 길이 보장받기에. 그래서 누구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트웬티투'와 '프리펙트'에 쉽게 대항하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쉽게 순응하면 좋겠지만, '토미 저드'와 '가이 베넷'은 그럴 수 없다. 토미 저드는 권위적인 체제, 특권의식이 풍기는 비린내에 구역질이 치미고, 동성애 성향으로 동료 남학생과 자주 사랑에 빠지는 가이 베넷은 영국 성공회의 학교 분위기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토미 저드와 가이 베넷은 시대, 그리고 학교와 불화하는 인물이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는 '낡은 것'과 '새로움'(혹은 '이미 이룬 것'과 '시작하는 것')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에너지로 볼 수도 있다. 극 중 가이 베넷과 토미 저드가 구시대적인 관습, 불합리한 질서와 대립하는 것이 그랬다. 연극 외적인 면에 이 구분을 대입해 봐도 흥미롭다.
2019년에 김태한 연출로 한국에서 초연하는 <어나더 컨트리>의 원작은 1982년 줄리언 미첼이 쓴 < Another Country >다(이 작품은 당시 '올리비에 어워즈'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면에서 정점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어나더 컨트리>는 김태한 연출의 첫 작품이다).
배우진도 흥미롭다. 무려 13명의 신인들이 이 극을 통해 처음으로 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리는데, 이들의 풋풋한 열정과 연극·영화 계의 실력 있는 선배의 관록이 함께 부딪히며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관객에게 얼굴을 비쳤던 이동하와 드라마 <닥터 프리즈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연극 <블라인드>, <나쁜 자석>으로 유명한 박은석이 '가이 베넷'을 연기한다. '토미 저드' 역으로는 뮤지컬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로 인상 깊었던 이충주가 분한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앙상블을 눈여겨보는 것도 좋은 관람 방법이다.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하면 연극 <어나더 컨트리>에서 독백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말과 말, 동선과 동선, 배우와 배우가 서로를 어긋나며 에너지를 흩트렸다가, 점점 부딪히기 시작하며 서서히 쌓아가는 감정이 폭발할 때 내뿜는 에너지도 어마어마하다. 배우 출신의 연출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배우의 동선과 움직임에 고심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가이 베넷의 의미심장한 대사
▲ 연극 <어나더 컨트리> 캐스팅(5월 26일자) ⓒ 이정식
두 명의 주연 캐릭터가 시대와 학교에 저항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동성애적 성적 지향의 가이 베넷이 '육체적인 저항'(본능)이라면, 막스주의에 심취해 특권의식과 모든 종류로서의 권위의식에 염증을 느끼는 토미 저드는 '정신적인 저항'(사상)이다.
극이 진행되며 이 둘의 저항방식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육체(본능)로 저항했던 가이 베넷은 소련으로 망명하고(사상적인 저항), 언뜻 사회주의 이념에만 충실했던 토미 저드는 학교가 더 큰 악(파울러가 기숙사장이 되는 것)에 잠식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기꺼이 '프리펙트'가 되고자 한다(육체적인 저항).
제임스 하코트와의 동성연애가 들통나 버려 프리펙트에게 처벌받은 가이 베넷은 토미 저드에게 말한다. "그런 나라가 진짜면 좋겠는데. 그럼 지상의 천국일 텐데." 그런 그에게 토미 저드는 냉소적으로 말한다. "아니, 지상의 지상이야. 그냥 지상." 결국 토미 저드는 알고 있던 걸까. 지상의 모든 나라에서 완벽한 행복이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엔딩에서 심문받던 가이 베넷은 의미심장한 대사를 내뱉는다. "무엇이 가장 그립습니까?" "크리켓이 그립소."(당시 그는 크리켓을, 귀족 스포츠라고 싫어했다) 그는 왜 마지막 순간에 크리켓을 그리워했을까. 오랜 망명과 스파이 생활로 지칠 대로 지친 그가 떠올린 것이 크리켓이라는 건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결국, 상류층의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이거나, 혹은 애틋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거나. 어찌 됐든, 모든 나라는 결국 '지상의 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이 베넷은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서 그제야 깨닫는다.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을 떠올리다
나는 이 연극을 보고,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을 떠올렸다. 소설 속 '이명준'은 남한에 있었다가, 사랑에 빠지고, 그러나 깊게 사랑하지 않아 죄책감을 가지며, 남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그는 결국 월북하여,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노동신문 편집부의 기자가 되었지만, 공산당원에게 심문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북한 삶에서도 염증을 느낀다.
한국전쟁 중 그는 미군과 UN군의 포로가 되어, 자신을 중립국으로 가게 해 달라고 외친다. 그런데 그는 왜, 인도로 가는 바다 한복판에서 자신의 몸을 던졌을까. 나는 그가 처음 북한 땅을 밟은 이명준의 내면을 묘사한 소설의 한 대목에서 힌트를 얻었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이 고장 됨됨이를 똑똑히 느끼기는, 넘어와서 바로 북조선 굵직한 도시를, 당이 시켜서 강연 걸음을 했을 때였다.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 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 최인훈, 광장, 93.
처음 그를 북한으로 이끈 것은 죄책으로부터의 도피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광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존재가 실존하기 위한 새로운 장소로, 사상과 삶이 완전히 일치된, 활발한 정치적 통일체를 꿈꾸며 공산주의의 북한으로 갔던 그는, 북한 땅을 딛자마자 참혹한 실상의 풍경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하지 못했으리라. 중립국으로 가려던 그가 도중에 바다로 뛰어든 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는 '지상의 지상'에 불과할 뿐이고, 완벽한 행복(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깨달아서가 아닐까.
▲ 연극 <어나더 컨트리> 커튼콜(5월 26일자) ⓒ 이정식
이제,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밝혀야겠다. 연극과 교회, 두 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하던 나는, 그로부터 2년 뒤 비밀스러운 밀월관계를 끝내고 더 이상 연극의 나라로 여행가지 않았다. 처음 몇 달간은 내 선택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한번 선택했으면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자주 '여기가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라는 구절이 되풀이되어, 자주 다른 나라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뒤돌아보면,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 다만, 조금 궁금할 뿐이다. 교회 전도사가 아닌, 배우 이정식은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을 만족해 했을지. 나는 연극 <어나더 컨트리>의 배우들을 보면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