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9 14:19최종 업데이트 19.09.03 09:56

뉴욕 코리아타운. 코리아웨이 표지판이 보이는 맨해튼 32가. ⓒ 막걸리학교

 
뉴욕 사람들을 뉴요커(New Yorker)라 부른다. 하지만 단순하게 뉴욕 사람의 뜻만 지니고 있지는 않다. 세계 경제와 문화가 융합하고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다채롭게 살아가는 뉴욕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뉴욕에는 차이나타운이 있고 리틀 이탈리아도 있지만,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코리아타운 32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대체로 타운 하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는데, 뉴욕 코리아타운은 한국인들이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한인 사업가들이 활보하는 곳이다.


타운의 거리도 200m 정도로 짧지만 상점들이 생물처럼 움직인다. 현재는 31번가와 33번가로 한인 상가들이 늘어나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32가 동쪽으로 공연장과 도서관과 요리실습장이 갖춰진 7층 높이의 코리아 문화센터도 2020년 말 목표로 짓는 중이다.

32가를 느리게 걸어보았다. 한국 식당과 화장품 가게와 빵집과 마트와 은행이 모여 있다. 1970년대 옷 도매업을 하는 한인들에게 밥을 팔려는 한식당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됐는데, 이제는 한식당을 찾는 뉴요커들이 모여들어 주말이면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붐빈다. 뉴욕이 한국 문화 콘텐츠에 주목하고 있다는 말을 실감한 현장이었다.

32가 한식당들의 상호를 살펴봤다. 한국 음식 이름을 달고 있는 곳은 북창동 순두부, 이모김밥, 만두바, 곱창스토리, 소주하우스 정도였다. 적어도 순두부, 김밥, 만두, 곱창, 소주라는 이름만으로도 뉴요커를 모을 수 있다는 얘기다. 술 이름으로는 막걸리도 약주도 아닌 소주가 눈에 띈다.

소주(Soju)라는 단어는 2008년에 미국 영어의 지표인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등재됐다. 그전까지는 소주는 코리안 보드카, 가벼운 보드카 정도로 불렸다. 그 설명은 지금도 따라다니지만, 이제 뉴요커들에게 소주는 그을린 오크통에 숙성시킨 버번 위스키보다는 깔끔하고 담백한, 보드카보다는 순하고 부드러운 증류주로 통하고 있다.

소주하우스에 간판이 없는 이유
 

소주하우스 실내 디자인, 벽면에는 침출주와 소주가 전시돼 있다. ⓒ 막걸리학교

 
32가와 5번 에비뉴가 만나는 목좋은 곳에 소주하우스가 있다. 그곳을 찾아가려면 정확한 주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 간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좁은 밀실은 아니다. 1층에 정관장과 신한은행이 들어선 건물 출입문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리면 바로 주점이 나온다.

뉴욕에서 주점은 통상 '바(Bar)'를 의미한다. 식사를 곁들이면 '바 앤드 레스토랑(Bar and Restaurant)'이 되고, 고기를 다루면 '바 앤드 그릴(Bar and Grill)'로 통한다. 소주하우스는 바 앤드 레스토랑인 셈이다.

소주하우스 중앙에는 높은 탁자가 바처럼 길게 놓여 있고, 주방 쪽 홀에는 한국의 연탄구이 돼지갈비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양철판을 올린 드럼통이 있다. 연탄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은 없지만 한국 느낌을 내는 디자인을 가져온 것이다. 좌석은 140석 정도인 제법 큰 술집이다. 32가가 내려다보이는 창밖으로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하늘 높이 치솟아있다.

소주하우스 문준호 대표에게 물었다.

"왜 밖으로 간판을 걸지 않았습니까?"
"음식점은 음식 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나야 비로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간판이 화려하면 간판만 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희가 원하지 않는 손님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가 소주를 판매하는 전략은 소주하우스 홍보물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소주하우스 홍보물에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두꺼비는 한 시절 희석식 소주의 상징이었던 진로 참이슬의 이미지다. 홍보물에는 소주를, 한국의 어떤 술집보다도 상세하고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쌀로 만들었던 소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술이다. 소주는 불에 탄 술이라는 뜻이다. 한국 소주는 페르시아에서 전래됐다. 1965년 이후 정부 정책으로 희석식 소주만을 빚게 됐다. 한국의 편의점, 슈퍼마켓, 음식점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곳에서 소주를 구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한국 사람들은 소주를 마실 때 꽤 엄숙하고 진지한 토론을 펼치고, 술잔을 받을 때는 두 손으로 받고 어른 앞에서는 고개를 돌려서 마시며, 이런 습관은 효도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문화적인 특성까지도 소개한다.

멀리 나오면 버리고 와야 할 것들이 많다. 뉴욕 코리아타운은 그저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며 한국 사람끼리 알아주는 곳이 아니다. 세계 문화의 용광로라는 뉴욕 맨해튼에서 한국 문화 콘텐츠를 가지고 뉴요커들을 상대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문 대표는 소주를 팔면서 효도라는 말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비록 한 줄 한 단어에 불과하지만, 뉴욕 문화와 융화되기 어려운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요커들이 한국 문화와 한식과 소주와 효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뉴욕은 강자도 살아남지만, 약자인 마이너리티도 당당하게 살아남는 곳이기 때문이다.

1시간은 기다려야 맛볼 수 있는 소주
 

티셔츠에 새겨진 소주하우스 상호와 이미지 ⓒ 막걸리학교

 
소주하우스 메뉴판을 봤다. 그 흔한 위스키나 와인이나 사케는 없다. 소주가 프리미엄 소주와 일반 소주로 구분돼 있다. 프리미엄 소주로 한국의 증류주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화요'와 롯데에서 출시한 '대장부'가 있고, 뉴욕에서 생산되는 한국형 소주 '웨스트32', '토끼소주', '여보소주'가 있다. '참이슬'과 '처음처럼'도 자리잡고 있다.

문 대표는 뉴욕에서 소주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참이슬과 처음처럼으로 대표되는 한국 소주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한국 전통 소주가 따로 있는 줄을 안다. 하지만 술은 술집 주인이 팔고 싶다고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미연방 재무부 산하 주류담배세금무역국(TTB)의 승인을 받고 수입되는 상품이어야 한다.

한국의 다양한 소주가 곧바로 소주하우스의 메뉴판에 오르지 못한 이유다. 희석식 소주를 제외하면 무역국의 승인을 받은 한국 증류주는 '화요', '문배주', '이강주', '국순당 려', 한국애플리즈의 '찾을수록' 등 10개를 헤아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뉴욕에서는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한국 술도 뉴요커들에게 새롭게 다가가야 한다. 문 대표는 소주를 통해서 "한국의 '꺾는 문화'를 전파하고 싶습니다"고 했다. 이 말만 들으면 효도처럼 뉴요커들에게 다소 어색한 문화를 끼워 넣으려는 것처럼 들린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보았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뉴욕은 바의 문화다. 뉴요커들은 바에 나란히 앉아 칵테일 한 잔을 시켜 놓고 하염없이 이야기한다. 술자리에 앉으면 거침없이 술잔을 꺾는 한국 문화와는 다르다. 칵테일은 너무 달고, 위스키나 보드카는 너무 독하거나 비싸다. 함부로 꺾을 수가 없다.

그에 견주면 소주는 순하면서도 저렴하고, 두 손가락에 걸릴 정도로 잔이 작다. 소주라면 뉴요커도 한국인처럼 꺾을 수 있다. 그리고 안주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뉴요커들의 바는 너무 좁고 길어 안주가 놓이질 않는다. 소주하우스가 양철로 된 넓고 둥근 탁자를 들인 이유는 푸짐한 한국 안주를 놓기 위함도 있지만 뉴욕의 바 문화에 한국 술 문화를 접목하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한국 음식에 한국 술로 한번 꺾어보자고!
  

소주하우스 창밖으로 보이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 막걸리학교

 
뉴요커들은 주로 초저녁에 소주하우스를 찾는다. 그들은 1시간씩 줄을 서 있다가 들어올 수 있는 인내력을 지니고 있다. 다른 인기 있는 바에서도 그러한 것처럼. 반면 한국 유학생이나 교포들은 소주를 마시기 위해 1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들은 손님이 줄어드는 저녁 10시쯤에 찾아온다. 그래서 소주하우스는 항상 붐빈다. 어느 토요일 저녁 10시 50분 소주하우스를 찾아갔는데, 그때까지도 줄을 서는 사람들 때문에 홀로 들어서기가 어려웠다.

32가 코리아타운이 내려다보이고 케이팝이 흘러나오는 소주하우스에 앉아 오이소주 칵테일에 등갈비찜을 시켰다. 오이 칵테일 소주에는 말린 붉은 고추가 들어있고, 등갈비찜에는 포기김치가 들어있다. 옆 탁자의 뉴요커에게 소주 맛이 어떠냐고 물으니, "Soju, Soju, so good(소주, 소주, 좋아요)!"이라며 술잔을 치켜든다. 소주는 한국 음악의 리듬을 따라 뉴요커들과 맨해튼에서 그렇게 소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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