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1 14:52최종 업데이트 19.05.21 14:52
신필규님은 한국 최초의 성적소수자를 위한 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의 활동가입니다.[편집자말]
  

2016년 6월 1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2016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퀴어문화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북을 치고 있다. ⓒ 이희훈


지난 5월 7일 '서울광장퀴어행사를반대하는서울시공직자'라는 이름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반대하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퀴어문화축제 반대 행렬에 공무원까지 뛰어든 점은 흥미로웠으나, 이들의 숫자는 고작 17명에 불과했고 성명의 내용 또한 보수 개신교계 혐오집단의 주장과 다를 것이 없었기에 그다지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선정적이고 음란한 퀴어문화축제가 정서적 폭력이나 다름없으며 이는 서울 시민의 권리 침해라고 이야기 했다. '선정'과 '음란'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폭력'과 '권리 침해'로 연결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하지만 성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안을 제시하겠다며 '공개된 장소가 아닌 장소에서 행사를 치를 것'이라고 주장한 부분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광주퀴어문화축제가 열렸던 지난해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다. 당시 '5·18 구속부상자회 비상대책위'는 축제가 5.18 민주광장에서 열리는 것을 문제 삼으며 '꼭 하고 싶다면 실내에서 하라, 5.18 민주광장에서는 허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런 식의 입장들은 언뜻 보기에 무조건적이고 강경한 반대보다는 합리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원천적인 봉쇄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자는 주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광장이 아니라 밀폐된 공간에서 퀴어문화축제를 하라'는 주장도 논의의 여지로 남겨도 될 하나의 의견으로 볼 수 있을까.

'광장만 아니면 된다'는 말이 차별인 이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보긴 어렵다. 애초에 '광장'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린 공간이 아닌가. '광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것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할 공동체 구성원과 그렇지 않은 외부인'을 나누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그 때문에 광장을 포함하여 퀴어문화축제의 공공 장소 사용에 반대하는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다. 이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공동체에서 드러나선 안 되며 그런 상황은 보편적인 권리를 박탈해서라도 막겠다는 주장과 같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앞서 언급했던 성명을 발표한 '17인 서울시 공직자들'의 자격을 의심한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불평등한 시선으로 시민을 바라보는 공무원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물론 퀴어문화축제를 향한 반발을 보며 씁쓸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은 축제의 필요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를 향한 여론이 점차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불편한 이웃으로 여기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으레 등장하는 '존재는 인정하지만 내 주변에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이를 방증한다.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그런 존재다. 어딘가에는 있을지 몰라도 곁에는 없었으면 하는 사람들. 함께 일상을 나누고 싶지 않은 집단들. 거리나 광장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들. 모여서 놀건 축제를 하건 어딘가에 숨어있었으면 하는 대상들.

퀴어문화축제가 가진 정치적 의미
 

2018년 7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은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반대하며 퍼레이드를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하나의 사회적 집단을 이렇게 '불편한 존재'로 여기는 일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차별이자 혐오다. 그리고 퀴어문화축제는 정확히 이러한 배제와 멸시에 도전한다. 축제가 광장과 공원 그리고 거리에서 열리는 이유는 단순히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회에 드러나지 않기를 강요받는 사람들이 그러한 폭력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소수자의 이름으로 모든 시민에게 열린 보편적인 권리를 행사하며 자신도 평등한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드러내는 행위다. 말하자면 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축복하는 축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별과 금기에 도전하는 정치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성소수자들이 광장에 모인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물론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음에도 여전히 축제가 광장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를 향한 보수 개신교계 혐오집단의 일방적인 방해와 공격을 대등한 두 집단의 대립과 갈등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타협해서 좋게 마무리 지을 일을 왜 이렇게 시끄럽게 만드냐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어떠한 정치적 도전도 아무런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세상이 시끄러워져야만 사람들은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도전과 질문이 사회를 바꾼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글을 닫고자 한다. 혐오집단의 방해를 뚫고 퍼레이드를 마친 어느 해 퀴어문화축제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나에게 한 중년의 남성이 질문한 적이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처음에는 그 질문이 우리를 향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방향이 달랐다.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하는 일이라곤 깃발을 들고 춤을 추는 것밖에 없는데 왜 누군가는 당신의 행사를 기를 쓰고 막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그 남자는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치 못한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에겐 성소수자의 존재도 보수 개신교계의 혐오도 모두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질문이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느 해 어느 지역에서건, 하다 못해 뉴스를 통해서라도 그 사람은 퀴어문화축제를 계속 보게될 것이다.

지난 5월 17일에 열린 제2회 전주퀴어문화축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전주를 시작으로 퀴어문화축제는 서울, 대구, 제주, 부산, 광주와 인천으로 이어질 것이며 올해는 경남도 이 대열에 함께할 예정이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열릴 퀴어문화축제와 함께 광장의 의미가, 집회와 행진의 의미가 다시금 되새겨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에게도 평등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와 이를 덮으려는 혐오가 다시금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질문 또한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것이 공동체의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어지는 도전과 질문이 사회를 바꿀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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