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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는 유독 많은 기념일이 있다. 그 중에서도 5월 8일 어버이날은 오랜 역사에 얽힌 다양한 곡절과 사연, 그리고 노래를 품고 있다. 5월 두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기념한 미국의 영향으로 약 백 년 전쯤부터 한국에서도 기독교인들 중심으로 어머니날을 챙기기 시작했고, 1955년 9월에는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5월 8일이 어머니의날로 공식 확정되었다. 이후 1973년에는 기념일 이름이 어버이날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름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어버이날에 많이 듣고 부르는 노래는 여전히 어머니 중심이기는 하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어머님 은혜>도 그렇고, 그보다 앞서 발표된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어머니(의) 마음>도 그렇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처럼 어버이날 노래가 공식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두 곡은 사실상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양주동이 작사하고 이흥렬이 작곡한 <어머니(의) 마음>은 그냥 어버이날에만 국한되는 노래에 그치지 않고, 시공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의 감동을 이끌어낸 사모의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부르면서 뭉클한 떨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작곡자 이흥렬은 1976년 5월 신문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의) 마음>을 만들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 곡을 만든 것은 1935년으로 기억돼요. 양주동씨가 발표한 시를 어느 잡지에서 읽고 큰 감명을 받아 곡을 붙였지요." 같은 인터뷰에서 작사자 양주동은 "이 곡은 일제, 해방 후를 가리지 않고 민족을 초월하여 사람의 가슴을 울려 왔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마음>이 광복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역시 알 수 있다.

그런데, 작자 두 사람의 말에는, 특히 이흥렬의 말에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지 않은 은폐와 모호함이 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순차 간행된 <양주동 전집>을 보면, <어머니(의) 마음>이 따로 수록되어 있지 않다. 양주동 본인의 말대로 '이 시는 나의 시 작품 중 가장 알려진' 대표작임에도 불구하고 전집에 수록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흥렬은 정말 1935년쯤 어느 잡지에서 양주동의 시를 보고 곡을 붙였던 것일까?

<어머니(의) 마음>이 실제 광복 이전 잡지에서 확인되기는 하나, 이흥렬의 얘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1941년 9월 잡지 <삼천리>에서는 <어머니 마음>을 '신가요집'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면서 이런 설명을 붙여 놓았다. "이상의 가요 수십 편은 모다 조선방송협회에서 일반 가정에 좋은 노래를 보내 드리고자 시단 제씨에 위촉하여 작사케 하여 작추 이래 방송하여 온 모든 요곡들이다." 그리고 1941년 2월 잡지 <家庭の友>에서는 '가정가요의 정화'라는 제목으로 역시 <어머니 마음>을 수록했다. 1940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방송협회의 <가정가요 제1집>에도 <어머니의 마음>이 수록되어 있다. <어머니(의) 마음>이 방송, '가정가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이로써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방송을 통해 유통된 '가정가요'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해서는 1939년 1월 신문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조선적 음악을 어떻게 창조해야 할까'라는 좌담회 기사에서 경성방송국을 대표해 참석한 이혜구가 "유행가는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적 리드도 아닌 중간의 것으로서 일반 가정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 가정가요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을 모집해 볼까 하는 것입니다."라고 계획을 설명한 것이다. 실제 이러한 계획에 따라 1940년 8월부터 '가정가요'가 방송을 통해 보급되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마음>도 다음달 9월에 처음 방송으로 소개되었다.
 
'가정가요' <어머니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1940년 9월 16일 방송 프로그램 기사
 "가정가요" <어머니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1940년 9월 16일 방송 프로그램 기사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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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정리해 보면 <어머니(의) 마음>이 만들어진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9년부터 준비된 경성방송국의 계획에 따라 양주동, 이흥렬이 위촉을 받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가정가요' <어머니(의) 마음>은 1940년부터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1935년 무렵 잡지를 통해 작가 간 교감이 있었다는 이흥렬의 회고는, 뒷받침할 수 있는 다른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사실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흥렬은 왜 사실과 다른 발언으로 <어머니(의) 마음> 실제 창작 배경을 감추었던 것일까? 이는 아마도 경성방송국, 그리고 그 계획으로 시작된 '가정가요'의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경성방송국은 사실상 국영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가정가요' 또한 관제가요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가정가요' 중 <애국일 노래>, <지원병 장행가>, <희망의 아침> 등 일부 작품은 분명한 친일적 내용을 담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의) 마음>은 국민총력조선연맹과도 관련이 있었다. 1940년 10월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조선총독이 총재를 맡기도 한 당대 최대 규모의 관변단체였는데, 여러 가지 사업 중 하나로 1941년 11월에 영화, 노래 각 두 편을 추천작으로 선정했다. 영화는 내선일체와 지원병 출전을 장려한 <그대와 나>, 그리고 기록영화 <조선농업보국청년대>였고, 노래는 '가정가요' <산에 들에>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사실상 관제가요로 만들어져 관변단체의 적극 지원까지 받았으니, 1945년 이전에는 그만큼 순조롭게 <어머니(의) 마음>이 유포될 수 있었겠지만, 광복 이후에는 그런 사실을 드러내기가 작가들로서 당연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작품 내용 자체에 친일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전혀 아니나, 위에서 정리한 내용을 확인한 뒤라면 어쩔 수 없이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양주동, 이흥렬 두 사람이 어머니를 그리고 기린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담은 작품 <어머니(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충분히 아름답다. 80년 가까이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곡이기에, 이제는 작가의 것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경위를 외면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씁쓸함까지 아우르는 데에 <어머니(의) 마음>의 역사적 참맛이 있다.

태그:#어머니(의) 마음, #양주동, #이흥렬, #가정가요, #경성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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