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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참석을 막으려는 사람들보다 경호원의 숫자가 더 많고, 경호원보다 카메라를 든 기자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 황교안을 향한 카메라 세례 그의 참석을 막으려는 사람들보다 경호원의 숫자가 더 많고, 경호원보다 카메라를 든 기자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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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일찌감치 수많은 경찰들이 묘역 주변을 에워쌌다. 접근로 양쪽에는 성벽처럼 경찰 버스가 늘어섰고, 비옷을 입은 경찰들이 도로변 가로수마냥 빼곡하게 늘어서있다. 듣자니까, 묘역 입구에서 보수단체의 집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자가용 출입이 통제된 주차장에는 방송사와 언론사 로고가 적힌 차량들로 가득하다.

1년 중의 단 하루, 오늘만큼은 묘역의 주인은 영령도, 유가족도, 추모객도 아닌 기자들의 카메라다. 추념식이 열리는 광장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묘역 곳곳에 마치 CCTV 마냥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심지어 상공에도 여러 대의 드론이 날아다니며 묘역 전역을 촬영하고 있다.

양쪽 어깨에 역기만 한 크기의 카메라를 둘러멘 기자들이 추념식에 참가한 유가족들보다 더 많아 보인다.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이동식 사다리를 든 채 묘역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기자정신'이겠으나 난 그 소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그들의 카메라 대부분은 식장 맨 앞줄에 앉게 될 정치인들에게 향할 것이다. 이따금 묘역 전체의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거나, 유가족들이 애통해하는 장면을 적절히 섞을지도 모르겠다. 

서울서 내려와 광주에 정착한 뒤 20년 넘게 잊지 않고 아버님 기일 챙기듯 추념식을 지켜봐왔다. 광주시민이라면 대개 그럴 테지만, 5월 18일에 망월동을 찾아가지 않으면 괜스레 뒤통수가 따갑고 죄 짓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추념식이 한낱 관행적인 '퍼포먼스'처럼 여겨져 내심 속상하다.

언제부턴가 추념식에 누가 참석하는가가 사람들의 유일하다시피 한 관심거리가 돼버린 듯하다. '카메라의 범람'이 그것을 증명한다. 영령들 앞에 유가족과 광주시민들은 5월 18일을 기일로 삼고 제사 모시듯 옷깃을 여민 채 묘역을 찾는데, 저들의 카메라는 추념식이 마치 '손님맞이' 행사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고 있다.

높은 분들이 많이 참석하면 추념식의 격이 높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는 것인가.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가 추념식을 찾아왔기에 영령들과 유가족, 광주시민들이 큰 위로를 받은 건 아니다. 대통령이기에 앞서 5.18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고 광주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명토 박은 '문재인'이었기에 눈물을 흘리고 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이른바 '이명박근혜' 시대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과거 이명박과 박근혜의 참석을 바랐던 건, 그저 5.18이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일대사건이라는 걸 인정하라는 외침이었을 뿐, 그들을 통해 위로받으려는 기대는 애초 없었다. 끊임없이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몰역사적 권력에 맞선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조차 방해한 정권 아닌가.

황교안이 주인공인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분향하려다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다.
▲ 저지당하는 황교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분향하려다 5·18 망언 의원 징계와 5·18특별법 개정안 처리 등 밀린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 "빈손"으로 재차 광주 방문을 강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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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카메라에 39주년을 맞은 올해 추념식의 '주인공'은 단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였다. 식장에 들어올 때부터 대통령보다 더 많은 경호원이 따라붙는 모습이었다. 지난 번 '민생 투쟁 대장정' 때 KTX 광주송정역에서 물세례 봉변을 당했던 터라, 검정 양복 차림의 건장한 '어깨'들이 이중삼중 그를 에워쌌다.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탓인지 물세례는 카메라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실 '민생 투쟁 대장정' 때나 지금이나 그가 받은 건 물세례가 아니라, 카메라 세례였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장관과 국회의원은커녕 대통령조차도 끌지 못한 카메라의 시선을 식장에 들어올 때부터 독식하다시피 했으니, 이번 추념식은 온전히 황교안을 위한 행사였던 셈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는 애초 추념식에 와서는 안 될 인물이다. 추념식이란 무릇 5.18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고 광주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5.18에 대해 망언을 일삼은 당 소속 국회의원들에 대한 징계를 머뭇거리는 행태만으로도 그는 이곳에 올 자격이 없다.

얼마 전 유시민 작가는 한 인터넷 방송에서 굳이 참석하겠다는 야당의 대표를 막을 도리는 없다며, 말 걸지 말고 악수에 응하지도 말며 등을 돌린 채 무시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솔깃한 제안에 많은 광주시민들이 무릎을 치며 동조 의사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식장에서는 바람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부나방처럼 떼 지어 그에게 몰려든 카메라들 때문이다. 그가 탄 버스가 묘역에 진입하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셔터를 터뜨렸고, 그를 본 일부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황교안은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어수선해질수록 더 많은 카메라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결과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추모를 위해 찾아온 야당 대표에게 지나치게 후한 대접을 한 꼴이 됐다. 이번 참석 결정을 두고 그가 지역 갈등을 부추겨 보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대선 행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던 터다. 정치인에게는 '무명'보다는 차라리 '악명'이 더 낫다는 불문율에 비추어보면, 그는 5.18 영령들 앞에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온통 황교안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식장을 뒤로 한 채 망월동 구묘역을 찾았다. 주지하다시피, 추념식이 열리는 신묘역은 1997년 완공되어 2002년에 국립묘지로 승격한 곳으로, 공식 명칭은 국립 5.18 민주묘지다. 5.18 사적지인 망월동 구묘역은 신묘역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데, 이곳이 당시 계엄군이 시신을 쓰레기차에 실어 내다버린 현장이다.

이곳의 유해는 대부분 신묘역으로 이장됐지만, 참혹한 역사의 현장인 까닭에 당시의 외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와 박근혜 정권 탄핵의 시발점이 된 백남기 농민이 이곳에 잠들어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재작년 추념식에서 호명했던 조성만, 표정두 열사 등도 이곳에 모셔져있으며, 혁명시인 김남주와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등 숱한 위인들을 만날 수 있다.

추념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추모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구묘역은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신묘역을 뒤덮었던 카메라도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추모객을 따라 모든 카메라들이 신묘역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카메라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그는 신묘역으로 옮겨지지 않고 그대로 남은 열사들의 묘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며 묵념하는 모습이었다.
▲ 망월동 구묘역에서 만난 금발의 외국인 그는 신묘역으로 옮겨지지 않고 그대로 남은 열사들의 묘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며 묵념하는 모습이었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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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떠난 그 자리 비닐우산을 받쳐 든 한 사람의 뒷모습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이장되지 않고 구묘역에 그대로 남은 열사들의 묘를 차례차례 돌며 헌화하고 묵념하는 모습이 낯설고도 놀라웠다. 그의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에, 대체 이곳에 잠든 이들과 무슨 관계인지 차마 묻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딸아이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의 광주 공연 때 찾아온 수많은 외국인 '아미'들이 공연이 끝난 이튿날, 이곳 망월동 묘역을 찾아 참배를 했다는 것이다. 광주 출신 멤버인 제이홉이 노래한 '마 시티(Ma-City)'를 들은 뒤 외국인들조차 5.18에 대해 궁금해 하며 부러 묘역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열사들의 묘마다 국화꽃 한 송이를 묘비 앞에 놓고서 한참동안 안내판을 읽어 내려갔다. 스마트폰 번역기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묘역을 다 둘러보자면 오늘 하루로는 부족할 성싶었다. 그는 쪼그려 앉아 마치 유가족인 것처럼 무덤 앞에 놓인 유품 상자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그때 신묘역으로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려왔다. 추념식이 얼추 마무리된 모양이다. 행사가 끝났으니 황교안은 곧장 떠날 테지만, 금발의 외국인은 쉽게 구묘역을 뜨지 못할 것이다. 필경 5.18 영령들은 수많은 카메라를 이끌고 온 황교안보다 이름 모를 금발의 외국인으로 손으로 건넨 꽃 한 송이를 더욱 감사히 여길 것이다.

태그:#5.18 광주민주화운동, #황교안, #망월동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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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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