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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나는 20대고, 비혼주의자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요즘은 언론들에서도 '미혼'보다는 '비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걸 보면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언론이 '청년 세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다. 과연 이들은 청년들의 선택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비혼·무자식·대량실업…30년 뒤엔 각자도생 '배그 사회' (중앙일보, 2019.05.02.)
"결혼은 선택"…비혼 다짐하는 청년들 (대구신문, 2018.03.21.)
개인주의 사회의 결혼 변화…동질혼·비혼 늘어나는 한국 (연합뉴스, 2017.07.03.)


최근 몇 년 사이 언론들이 청년들의 '비혼 선언'에 주목하는 비중이 올라갔다. 적지 않은 언론이 이런 비혼 선언의 원인을 청년들의 '개인주의화'에서 찾는다. 그런데 사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조건이 이전과 달리 많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에 대해 연구한 장경섭 서울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현재는 "꿈꾸는 (방식의) 혼인과 출산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즉, 지금 처한 상황에서는 결혼과 출산은 합리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 청년들의 인심이 각박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선택권을 빼앗기는 사회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이솜 분)는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이솜 분)는 위스키, 담배, 남자친구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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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공녀>(2018)는 저성장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가 점차 선택권을 빼앗기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인 미소(이솜 분)는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청년이다. 연애 중이지만 서로 먹고 사는 일에 허덕이는 것은 다반사고, 결혼은 엄두도 못 낸다. 그 와중에 담배와 위스키를 사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월세가 5만 원 오른다.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택하고 집을 버린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이다. 집도 담배도 위스키도 버리지 않은 채 남자친구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그런 선택은 할 수 없는 상황. 

사회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그의 저서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선택권을 제공받는 동시에 빼앗기는 것은 곧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떻게든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하며 살아가지만, 사회적 조건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개인이, 더 나은 그리고 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받지 못한 채로 하는 선택은 한계가 뚜렷하다. 미소가 그랬고, 지금의 청년세대가 놓인 상황이 딱 그렇다. 

해외에서는 점차 선택지의 양과 질을 늘리는 방안을 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2004년 '시빌 파트너십(civil partnership)' 법을 제정했는데, 동성 커플에게도 결혼에 준하는 법적 권리를 부여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상속, 세제, 연금, 친척 관계 등에서 결혼한 이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2018년 6월에는 이성 커플에게도 시빌 파트너십을 허용하도록 그 범위를 확장시킨 바 있다. 

프랑스의 경우 1999년에 이성 또는 동성 성인 간의 시민 결합을 허용하는 시민연대계약(또는 공동생활약정, PACS)법을 제정하였다. 역시 법적으로 보장받는 관계다. 프랑스는 2013년 동성결혼이 제도화됐다, 시민결합과 별도로 유지되는 제도라는 점에서 개개인이 만들고 싶은 관계를 좀 더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됐다는 데 의의가 있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 1.77명이었던 프랑스의 출산율은 2010년 2.02명으로 증가했고, 이중 혼외출산 비율도 1994년 37.2%였던 것이 2013년 기준으로는 57.1%로 상승했다. 

다양한 가능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2014년 7월 열린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률 토론회
 2014년 7월 열린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률 토론회
ⓒ 공익인권법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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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이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자유롭게 삶의 방식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출산율에만 집착하는 정책만큼 해로운 것이 없다. 하지만 한국의 정책 담당자들이 '2018년 합계출산율 0.98'라는 숫자에 위기의식을 느낀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에서 배우려고 하는 성의는 보여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물론 이 정도면 성의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한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선택지를 확장시키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14년 진선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 것이 대표적이다. "혈연 또는 혼인 외의 이유로 생활을 공유하는 관계"에 대해 법률에 따른 보호를 받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처럼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고, 동성애를 조장하고 사회를 파괴시킨다는 다소 불합리한 비난에 직면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결혼과 출산이 당연시되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다양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논의하는 것과 연결된다. 각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적합한 결합방식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생활동반자법을 포함한 많은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입법화는 아직 난망한 상태다.

반복하지만 지금 청년 세대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그들이 개인주의적이라거나 각자도생 사회가 되어서가 아니다. 결혼이 괜찮은 선택지가 아니게 되어 버렸고, 다양한 선택지를 한국사회가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다양한 관계와 다양한 결합이 제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첫 문장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나는 20대고, '아직까지는' 비혼주의자다"라고. 

태그:#비혼, #개인주의, #선택권,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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