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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목련, 개나리, 벚꽃의 뒤를 이어 영산홍, 라일락, 박태기나무 꽃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꽃의 계절이다. 게다가 눈길을 돌려 골목시장이라도 가보면, 꽃만큼이나 곱고 향기로운 봄나물이 꽃을 보듯 사로잡힌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 때이기도 하다.

골목시장 입구부터 보이는 연하고 어린 초록빛 두릅을 지나칠 때면 아기 보듯 돌아보게 만드는 끌림이 참 좋다. 엄마를 닮아 나물반찬을 좋아하는 나는 고운 초록에 취해 봄나물을 사 가지고 올 때가 참 즐겁다. 하지만 집에 가서 펼쳐 놓고 다듬고 데치고 무쳐 내는 과정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일쑤다.

"반찬가게에서 사 먹는 게 싸고 경제적이야. 다음엔 하지 말고 사 먹자" 하며 마음먹을 때도 많다. 이런 나와는 달리 여전히 신선한 재료를 골라 직접 조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부지런한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엄마다.

80세 엄마는 83세 아버지와 현재 59년을 함께 지내고 있다. 인공관절수술 후에 걷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는 팔순 엄마가 아버지에게 해드리는 음식 수발은 네 명의 딸들 중 아무도 흉내를 못 낸다. 한 마디로 음식 공양에 가까운데, 덕분에 50+세대인 네 명의 딸들도 여전히 엄마가 만든 음식을 한 보따리씩 얻어먹을 때가 있다.

다양한 음식을 주제로 한 방송 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면서 엄마는 공부하는 학생처럼 진지하게 배우고 실습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특히 요리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인 <알토란>의 완전 팬이다.
 
엄마는 요리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인 <알토란>의 완전 팬이다.
 엄마는 요리를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인 <알토란>의 완전 팬이다.
ⓒ MB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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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여전히 요리에 대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것은 아마도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눈도 뻑뻑하고 다리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예전부터 지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음식에 대한 품평이다.

아버지의 음식 이야기는 음식뿐만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들과 공간 그리고 사건도 함께 등장하는 역사드라마가 될 때가 많다. 돌아가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큰 형수와 형제들, 자녀들까지 등장하는 대하드라마가 되었다가, 자녀들의 출가 이후에는 사돈까지 등장하는 시트콤이 될 때도 있다. 13살에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21살이나 차이가 나는 엄마 같던 큰형수가 해주던 음식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날달걀 앞뒤에 구멍을 뚫고 바람을 넣어 훅 불면 달걀 속이 나와. 속을 빼낸 그 빈 달걀에 불린 쌀을 넣어 밥솥에 쪄내면 그것은 막내인 내 차지였어. 달걀 껍데기를 까면 다른 집과 다르게 참 예쁜 주먹밥이었다."
"마늘종에 밀가루를 묻혀 쪄내서 간장 양념에 무쳐놓으면 아삭아삭하고 짭조름한 게 참 맛있었지."
"가죽 나물을 밀가루 반죽에 묻혀 말려 튀긴 부각을 먹으면 향긋한 게 정말 좋다."
"가지도 손가락 크기로 잘라 밀가루 묻혀 쪄내서 간장 양념으로 무치면 얼마나 부드럽고 맛있다고."


이렇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뻘 나이였던 맏형보다는 먹을 것을 장만해 주던 엄마뻘 큰 형수에 대한 이야기 분량이 항상 더 많았다. 어머니 돌아가신 무덤에서 까무러치도록 울다가 친구들 등에 업혀 내려왔다는 13살 어린 아버지와 83세인 늙은 아버지가 함께 등장하는 달걀밥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문득 안쓰러움이 밀려들 때가 있다.

편찮으신 모습으로만 떠오르는 어머니의 기억보다 큰형수의 음식 기억이 더 먼저 일어나는 것은, '사랑받던 어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노라'는 무의식의 셈법 같아서다.

하지만 늙은 엄마의 음식 앞에서 어릴 적 먹었던 추억 속 음식 모양이며 식감, 조리법까지 곁들여 일장 연설을 하는 아버지의 말을 듣다 보면 딸들은 자꾸만 엄마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애쓰고 기껏 해놓으면 뭐하냐" 하는 엄마의 단골 푸념이 나올 차례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 아버지 잡숫고 싶다 하면 이틀을 넘긴 적이 없다. 그렇게 차려내면 맛있다 한 적이 없으니 재미가 있겠냐? 그 맛이 아니라니, 그 맛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겠냐? 그 시절로 되돌아가기 전에는 난 네 아버지 입맛 못 맞춘다."

하지만 엄마의 성정으로 보아 푸념이 다가 아니라는 걸 딸들은 안다. 이러쿵저러쿵 잘난 체하는 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엄마는 다음 밥상에 올릴 반찬 궁리를 하느라 '끄응' 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뒤지거나, 골목시장 한 바퀴를 돌기 위해 현관문을 열 것이다.

절기마다 달라지는 '그 시절 그 맛'을 되뇌는 입덧 심한 우리 아버지를 위해 골목시장을 두리번거리며 장바구니를 끌고 다닐 팔순 엄마의 뒷모습이 벌써 훤하게 그려지는 날이다. 아버지의 추억 소환을 돕는 유능하고 성실한 요리사인 엄마 덕분에 아버지의 음식 추억담은 계속 보태지고 더해져서 생생한 진행형 이야기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태그:#어버이날, #아버지, #추억음식, #입덧, #알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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