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03 07:48최종 업데이트 19.05.29 16:20
손병덕. 그는 사할린에서 침뜸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25년여를 살아왔다. 그렇다고 침구사도 아니고 면허를 가진 의료인도 아니다. 그렇지만 사할린 사람들은 그를 '독토르(닥터의 러시아식 발음) 손'이라고 부른다.

45년생으로 충남 태안에서 태어난 그는 올해 칠십 중반에 이르렀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몸은 꼿꼿하고 정신은 총명하다. 침과 뜸을 다루는 그의 손길은 여전히 섬세하고 엄정하다. 
 

태안 고향집 툇마루에서 지난 4월 어머니 기일을 맞아 손병덕 선생은 고향 태안에 왔다. ⓒ 민병래

 
손병덕은 사실 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태안에서 형님과 함께 수산물로 잔뼈가 굵은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사할린 침구사'로 변신하게 된 것은 양파와 동태를 맞바꾸는 무역이 계기가 됐다.

동태를 연육으로 만들어 영국에 수출하던 거래처 '미스터 최'가 손병덕에게 연락을 해왔다. 현재 "러시아에 있다"며 "양파 1700톤을 보내주면 동태 1500톤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때가 1993년 봄 무렵이었다.


"돈이 되겠다"는 판단에 그는 제주와 마산에서 그러모아 1700톤을 보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톡에 하역한 양파는 물류창고를 구하지 못해 절반이 얼어서 못쓰게 되었다. 한국에 온 동태도 크기가 분류되지 않은 상태여서 상품성이 떨어졌다. 기대했던 무역은 큰 손해를 안겨주었다.

그 손실을 만회하고자 손병덕이 생각한 것은 '킹크랩 수입'이었다. 그렇게 해 사할린으로 들어간 그 때가 94년 7월. 통역을 3명까지 고용하면서 야심차게 던진 승부수였다. 그런데 중개업자가 거래대금을 갖고 도망을 가버렸다. 큰 사기를 당한 것이다.

결국 동태에 이어 킹크랩으로 두 번째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면목도 없고 돈을 돌릴 수도 없는데 수중에 남은 돈은 백 달러 남짓이었다. 호텔방을 나와 몸 하나 누일 방을 간신히 얻었다. 암담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날씨, 왔다하면 한길 가까이 쌓이는 눈을 헤치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김똘랴는 만성두통이 있었다. 그런 그가 어디서 들었는지 손병덕에게 "침을 놓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손병덕은 예전에 배운 침구 경험을 되짚어 경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고 백회에 뜸 다섯 장을 떠줬다. 첫날부터 김똘랴는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났다. 그렇게 5일 동안 침뜸을 놓으니 그는 "머리가 아프지 않다"며 너무나 고마워했다. 매일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살 것 같다"며 "무료로 1년간 통역을 해주겠다"고까지 했다.

시간을 거슬러 1987년 마흔 무렵, 손병덕은 내과의사 최형배를 만났다. 최형배는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와세다 의과대학을 졸업했는데 당시 무료진료병원이었던 '새마음병원' 내과과장이었다. 그는 침구에 조예가 깊었고 중국에서 선생을 초빙해 침구를 배울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

손병덕은 이 최형배로부터 '전통침구학'을 교재로 6개월 동안 침구를 배웠다. 이때 배운 침구 경험이 사할린에서 한 줄기 빛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김똘랴의 두통을 치료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손병덕의 집에는 하루 한 두 명씩 두통 환자들이 오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돌아 아침 9시면 손병덕의 집 앞은 환자들 차가 북새통을 이루었다. 손병덕은 면허가 없기도 하고 "실력도 깊지 않다"며 일절 돈을 받지 않았다. 오직 무료 봉사로 일관했다. 그렇지만 침뜸 효과 덕에 사람들이 쌀, 감자, 연어 등을 내놓고 갔다. 덕분에 끼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손병덕 선생이 침 놓는 모습 ⓒ 민병래

 
여기에는 사할린 사람들의 태도도 한몫했다. 그들은 침뜸이나 대체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기에 손병덕의 침뜸, 한국에서 건너간 침뜸을 선뜻 받아들였다.

침뜸은 우리 역사와 함께 해왔다. 뜸은 불을 이용하면서 시작됐고, 침은 돌침이나 뼈침 등과 같은 도구에서부터 유래되어 전통요법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침술은 조선에 와서 제도화되었다. 침구의를 분리시켜 별도로 의과고시를 시행한 것이다. 세종 때부터 침구 전문생을 해마다 세 명씩 뽑아 전의감·혜민국 등에 1인씩 배치하게 된다. 이것이 침구 전문의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민간에서도 '침쟁이'라고 불리우던 침구사들이 고을마다 널리 퍼져있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어려운 백성들 살림에 '한약재'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침구가 우리 전통의술, 민간의술로 사랑을 받아왔다. 그래서 예로부터 '일침 이구 삼약', 즉 으뜸은 침이고, 다음이 뜸이며, 마지막에 약이라 했다.

그렇게 손병덕은 침뜸에 대한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침구를 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수산업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어느 겨울 눈이 펑펑 오던 날, 손병덕은 돌아가신 어머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업 실패로 처자식과 헤어지게 된 신세에 서글픈 마음도 들고... 그래서 보드카를 한 병이나 들이마시고 절망감에 길거리를 헤맸다. 눈은 점점 많아지고 추위는 살을 에는데 자칫 쓰러지면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살아야가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발걸음을 추스렸다.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지만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방문했던 친구가 몸을 녹여주고 김칫국을 끓여주어 겨우 체온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손병덕은 수산업에 대한 미련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내려놓고 사할린에 정착키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배추농사였다. 그에게는 침뜸이라는 봉사말고 직업이 필요했다. 사할린에는 강제 징용 왔던 동포들이 김치와 된장을 보급해서 김치는 이곳에서 널리 사랑받는 음식이었다.

'노워트로이츠크'에서 2만4천평이나 되는 땅을 빌려 시작한 첫해 농사는 꽝이었다. 사할린의 토양을 잘 몰랐던 탓이었다. 다음 해부터는 한국의 고랭지 배추를 가져와 심었는데 잘 맞았다. 그래서 조금씩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땅에서 생명을 기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안정되었고 흙을 밟으면서 고향에 돌아간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침뜸은 농장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난치병 환자들이 농장으로까지 찾아와 통사정을 했기 때문이다.

1997년 가을 사할린에서 제법 큰 호텔을 경영하는 이기봉이란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을 받으며 농장막사로 왔다. 그는 '빠다그라'(통풍)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사할린 사람들은 기름진 생선, 연어알, 돼지고기, 소금에 절인 생선을 좋아해서 통풍을 많이 앓았다.

손병덕으로서는 처음 접하는 질병이었다. 우선 수지침과 꽁초뜸으로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궁리 끝에 마늘뜸을 해보기로 했다. 간접구와 관련, 전통침구서에는 소금, 마늘, 생강, 된장, 황토뜸이 언급되어 있지만 대개 전승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나름 지혜를 짜내 마늘을 얇게 저미고 거기에 작은 구멍을 내어 환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뜸봉에 불을 붙혀 마늘의 열성이 환부에 스며들게 했다. 놀랍게도 닷새 만에 붓기가 빠지고 환자는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손병덕이 새롭게 시도한 마늘뜸은 통풍에 효과가 있었다. 그 후 많은 통풍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는 마늘뜸을 조금씩 개선했다. 그는 소주병 뚜껑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어 열이 마늘에 전달될 수 있게 만든 뒤 그 안에 쑥을 저며 불을 붙이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병뚜껑 안에서 쑥을 태우다가 환자가 뜨겁다고 하면 집게로 병뚜껑을 들어 열기를 잠시 식혔다가 다시 마늘에 올려놓는 식으로 해서 효과는 보되, 환자들이 고통스럽지 않게 한 것이다.

이렇게 진화를 거듭하다 보니 농장으로 끊임없이 환자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손병덕은 농장에 야전차량을 갖다 놓았다. 2차 대전 때 러시아군이 쓰던 차량을 구해와 벌판 한 가운데 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들판 한가운데 '침구'병원이 선 셈이었다. 손병덕은 야전차량 실내 정면에 태극기를 걸어놓았다. 사할린 사람들에게 '한국침뜸'임을 은근히 자랑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손병덕 선생이 소금뜸을 놓아주고 있다. ⓒ 민병래

    
그 이후 그에게 또 특별한 환자가 농장으로 찾아왔다. 사할린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던 교포 2세 환자였다. 그는 '샤먼'이라는 애칭을 가진 주먹쟁이였다. 손병덕에게 왔을 때 가슴에 주먹만한 혹이 있었다. 딱딱하고 번들번들 한 게 보기에도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손병덕이 침을 꽂으려 했는데 워낙 딱딱하게 굳어서 자침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위에 우선 수지침부터 놓았다. 다른 경우 같으면 피가 나오든지 누런 물이 나오든지 하는데 이 환자에게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끈기 있게 혹 주변에 침을 꽂고 마늘뜸과 생강뜸을 함께 시술했다. 그렇게 일주일 지나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우선 제일 딱딱한 피부 밑이 물렁거리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을 더 치료 하니 침 놓은 부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면서도 가제를 차고 자야 할 정도로 물이 많이 나왔다"고 샤먼은 말했다. 환부가 말랑말랑해지더니 목 뒤쪽을 타고 올라가던 혹의 줄기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멈추었다. 그 후 계속된 침뜸 처방으로 그는 완치가 되었다.

처음엔 아무 것도 모른 채 치료를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피부암 환자였다. 그런 환자를 잘 살려낸 것이다. 그 환자를 고치고 나서 얼마가 지났을 때 샤먼이 다니던 암센터에서 손병덕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샤먼은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힘들어 포기한 환자였는데 침뜸치료만으로 완치된 검사 결과가 나오자 병원에서도 많이 놀랐다, 의사들이 사실 확인을 하고 싶어 손병덕을 보자"고 한 것이었다.

그 뒤로 암센터 부원장인 세르게이가 디스크 치료를 하고 싶다며 손병덕을 찾아왔다. 세르게이는 손병덕에게 "병원에서 함께 일하자"고까지 했다. 병원에서는 또 치료를 포기한 말기암 환자들을 간혹 손병덕에게 보내왔다. 침뜸 효과에 대해 나름 인정하고, 치료 과정을 지켜보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스탈린 때부터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의학을 일부 받아들였지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체의학이나 민간의술에는 개방적이었다. 면허 없는 손병덕에게 병원근무를 제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러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21세기 들어서 연간 5천여 명씩 침구사를 배출하고 있고 침구전문대학만 60여 곳에 이른다.

중국은 서의, 중의, 중서의 결합 의원을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서의병원에도 침구과, 중의과를 두고 있고 중의의원에도 수술실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서의도 침구를 시술할 수 있고, 침구의사도 서의적인 치료방법이 허용된다.

북한도 전통의학을 고려의학이라고 하여 '주체의학'으로 존중하고 장려한다. 보건의료 체계 속에서 침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전체 환자의 60% 이상을 침이나 뜸으로 진료한다고 알려졌다.

미국이나 유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대체의학으로 침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고 이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연수와 교육을 받는 실정이다. 이런 세계 흐름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는 전통침구나 대체의학에 보수적인 편이다.

손병덕은 이 점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가 만일 한국으로 돌아와 침뜸을 놓는다면, 무료봉사라고 하여도 의료법 위반이 될 수밖에 없다. 현행 법에선 "의료인 외엔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그래서 손병덕은 사할린에서 얻은 풍부한 임상경험을 한국 사람들에게 펼칠 수 없다.
  
지난 25년간 그는 사할린 사람들 그리고 까레이스키와 부대끼며 더불어 살아왔다. 농장에는 늘 환자들이 북적댔다. 그가 다룬 환자, 병명은 이제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도움을 받은 환자도 있고 치료가 실패한 경우도 많았다.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면허 없는 의료인'이기도 했지만, 처음 침을 가르쳤던 스승 최형배의 가르침때문이기도 했다.

스승은 6개월 침구수업을 마치며 손병덕에게

"너는 명의가 될 것이다"
"침을 놓되 돈을 받지 말아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는 말을 남겨주었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칠순이 넘은 지금은 그게 운명 같은 말이었고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채찍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명을 돕고 생명을 살리면서 돈도 받지 않으니 보람도 있고 늘 기쁘다"고 말을 한다. 오랫동안 침을 놓으면서 그는 어느 순간에 "자기 침을 만들 수 있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생가 툇마루에서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손병덕 선생 ⓒ 민병래

  
사할린은 사람을 살리는 데 면허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환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면 면허가 있건 없건, 그 방법이 서양의학이건 대체의학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여건 속에서 손병덕의 침뜸은 피어났다.

손병덕 그의 손은 뭉특하다. 그런데 손끝은 부드럽다. 그래서 침을 잘 다룬다. 침이 들어간 각도와 깊이를 잘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최형배는 손병덕이 "명의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한다. "마음을 다해 키우면 깨끗하고 맛있는 배추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침뜸도 마음과 혼이 들어가면 환자를 잘 고칠 수 있다"고.

언제쯤, 그의 25년 침뜸 경험방이 광화문, 혹은 인사동, 아니면 그의 고향마을 태안에서 자유롭게 펼쳐질 날이 올까? 

못다한 이야기

* 손병덕 선생은 지난 4월 중순 어머니 기일을 맞아 한국에 다니러왔습니다. 고향 태안에서 쑥도 거둘겸. 이때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사할린에서 싹 튼 아리랑 침뜸>에 수록된 사진과 인터뷰가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 손병덕 선생은 5월말 1박2일로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침구인세미나'에서 '마늘뜸, 소금뜸'을 주제로 강연할 예정입니다. 

 
손병덕의 프로필
1945년 충남 태안 출생
1980년 인천에서 수지침 학습
1987년 최형배 선생에게서 전통침술 사사
1993년 수산물 사업차 러시아에 왕래
1997년 사할린 노워트로이츠크에서 배추 농장시작
2007년 사할린 현지 한국기업들과 아리랑 장학회결성, 회장으로 활동 
2019년 5월 침구인세미나에서 '소금뜸, 마늘뜸' 발표 예정

손병덕의 도움을 받은 사할린 현지인 사진들 
 

통풍 치료를 받았던 이기봉 사장(오른쪽) 이기봉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1997년 가을 친구의 소개로 손 선생을 찾아 농장으로 갔다. 발이 많이 아프고 부어 신발도 못 신을 지경이었다. 특히 왼쪽 엄지 발가락 쪽은 벌겋게 되어 심하게 아팠다.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손 선생한테 가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처음엔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침뜸을 5번 하고는 아픈 게 없어졌다. 그 후로 12년째 괜찮다. 손 선생은 작은 침으로 피를 먼저 뺐다. 치료가 되니까 신기해서 통풍을 앓는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 10명 정도 치료를 받았다. ⓒ 허임기념사업회

 
 

손병덕선생이 늘 보고 아끼는 침구서적 인천에서 침구를 처음 공부할 때 보던 책들. 줄곧 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보고 또 보고 해서 손때가 묻은 책들이다. 오른쪽 침구경혈취혈법은 처음 최형배 선생이 침뜸을 가르칠 때 기본교재로 쓰던 책인데, 한국침술연합회 회장이었던 이우관 선생이 펴낸 것이다. ⓒ 허임기념사업회

 
 

청송댁 할머니와 손병덕선생(왼쪽) 할머니는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원래 경북 청송에 살았는데 18살에 부모도 못 보고 사할린에 왔다. 고향이 지금도 꿈에서 보인다. 오빠 올케 언니는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해 전에 교통사고로 어깨와 팔을 다치고 엉덩이 뼈 2개가 금이 갔는데 수술도 안 되고 병원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허락해줘 손 선생을 병원으로 불러 침을 맞았다. 걷지도 못하고 꼼짝도 못했는데 열흘 동안 침을 맞고 뼈도 붙어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도 놀랐다. 친정 오라비 같은 아제(손병덕 선생)한테 너무 고맙다. ⓒ 허임기념사업회

   

농장 한가운데 야전차량 안에서 손병덕 선생 손병덕 선생은 군용 야전 차량을 농장에 놓았다. 그곳에서 농장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한다. 실내 정면엔 태극기를 걸어 놓고 오는 사람들에게 한국을 알린다. ⓒ 허임기념사업회

 
 

자궁의 혹으로 고통을 겪었던 로자(오른쪽) 로자는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얘기한다. 40세쯤 됐을 때 병원에서 자궁에 혹이 있다고 했다. 혹이 특별히 커지는 것 같지 않아 수술은 안 했다. 그냥 두었는데 10년 뒤 2000년에 그 혹이 커졌다고 했다. 어머니와 언니가 모두 자궁암으로 죽어서 나도 걱정이 많았다. 언니는 자궁암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너무 고통스러워해서 손 선생을 찾아가 뜸을 했다. 얼마 후 죽기는 했는데 고통이 덜한 채 편하게 갔다. 나는 겁이 나서 미리 손 선생에게 침뜸치료를 받았다. 마늘뜸을 20일 정도 했는데 뜨겁고 아팠지만 참았다. 다행히 자궁에 혹이 없어지고 허리 아픈 것도 나아져 지금까지 괜찮다. ⓒ 허임기념사업회

 
 

신장암 말기에 침뜸 치료를 받았던 러시아 노인(왼쪽) 신장암 말기로 부종이 심해 일어나지도 못했던 러시아 노인이 손병덕 선생의 침뜸시술 후 증세가 좋아져 혼자서 일어나 사위와 나란히 다리를 견주어 보고 있다. ⓒ 허임기념사업회

 
 

2009년 사할린 암센터에서 현지의사와 포즈를 취했다 손병덕 선생은 면허도 없는 자신에게 암환자를 보내주는 러시아의 병원 의사들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비록 병원에서 수술도 해보고 항암치료도 하다 안 되어서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면허와 관계없이 민간의술의 도움도 받도록 하는 것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2009년 4월 사할린 암센터를 방문, 암환자를 보내준 의사를 만나 침뜸의 효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찍은 사진이다. ⓒ 허임기념사업회

 
덧붙이는 글 그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사할린에서 싹 튼 아리랑 침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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