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 서정준

 
"나는 감각이 지나가는 빈 껍데기야."

극 중 대사를 들으며 강한 지적호기심이 생겼다. 이는 내가 꼭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다소 도발적인 대사의 주인공은 뮤지컬 <달과 6펜스>다. 오는 21일까지 공연되는 이 작품은 최근 영화 <무간도>의 뮤지컬 쇼케이스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한 다미로 음악감독이 깊게 참여한 이른 바 '예술지상주의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머싯 몸의 명작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소설이 고갱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었듯, 소설 속 인물들에게 영감을 받아 새롭게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극중 '유안'과 '모리스', '미셸', '케이'는 미술에 대한 여러 담론을 무대 위에 쏟아낸다.

젊고 유망한 화가 유안은 아름다운 아내 미셸, 그를 지지하는 케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며 자신의 개인전을 준비한다. 그런 가운데 케이가 우연히 만나 알게된 천재성을 지닌 화가 모리스를 소개받게 되고, 그가 가진 강렬한 기운과 예술적 영감에 마음을 빼앗긴다.

모리스의 등장은 곧 미셸과 케이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정숙한 아내를 연기하던 미셸은 자신이 가진 강렬한 예술적 욕구를 깨닫게 되고, 케이 역시 강제로 미술을 그만둔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다.

그러는 사이 유안은 집과 작업실마저 내주고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강렬하게 모리스를 원하지만, 미술의 기존 법칙을 완전히 벗어난 그의 예술세계를 좇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예술을 찾아가게 된다.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 서정준

 
'예술지상주의 시리즈'는 첫 작품 뮤지컬 <광염소나타>에 이어 <달과 6펜스>에서도 예술의 본질, 예술과 삶의 경계 등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네 명의 인물은 마치 일종의 관념적 존재처럼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유안은 넘어설 수 없는 재능을 마주한 인간의 절망과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를, 모리스는 인간이 가지는 예술 혹은 타인에 대한 오만과 편견을, 미셸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알 속이었을 때의 충격을, 케이는 이 모든 것을 한 발 밖에서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은 관찰자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는 대단히 흥미롭다. 단순히 선과 악, 혹은 옳고 그름 같이 이분법적으로 인물을 재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유안과 모리스가 서로를 두고 이야기하는 2인극이었다면 <달과 6펜스>는 대단히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인간으로서의 내면을 가진 미셸과 케이가 덧붙여지면서 뮤지컬 <달과 6펜스>는 유안과 모리스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하기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두고 인간이 가진 존재론적 의미를 더해 철학적인 담론을 서로 교차해가며 관객들이 그 나름의 답을 찾아게끔 만든다.

유안이 한 마디 하고, 모리스가 한 마디 하면 관객의 머릿 속은 천사와 악마가 싸우듯 둘의 이야기를 두고 다투게 된다. '나는 정말 감각이 지나가는 빈 껍데기일까? 혹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걸 이해한다면 과연 일상적이고 보통인 나와는 다른 인간일까?' 다미로 음악감독과 함께 만들어진 아름다운 음악과 배우들의 노래, 연기를 보면서도 자신의 고민을 그 위에 얹게 된다.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 서정준

 
그렇게 생각하며 극을 즐기다 보면 인물들의 행동 하나, 대사 하나에도 여러 겹의 생각이 겹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예술적 욕구를 자각하지 못하던 미셸이 자신을 바라보며 부르는 '난 위태롭게 태어났나봐' 같은 이야기는 관객에게도 짜릿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선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그 점이 얼핏 보면 천재들의 고뇌를 담은 이야기 같은 <달과 6펜스>가 관객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곳에서든 나보다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닐수록 그 상황은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아마도 유안과 모리스, 미셸과 케이의 어느 단면과 겹칠 것이다.

특히나 예술가의 광기어린 살인에 의한 스릴러를 소재로 한 <광염소나타>가 '살인'이라는 강렬한 소재가 인물과의 동기화에 어려움을 제공한 것과 달리 예술을 마주친 서로 다른 인간들의 내면을 그려낸 <달과 6펜스>는 좀 더 불친절할지는 몰라도 더 가까이 다가간다.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뮤지컬 <달과 6펜스> 중 한 장면. ⓒ 서정준

 
다만 <광염소나타>가 명확한 시대 설정이나 음악적 디테일을 토대로 인상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던 것과 달리 <달과 6펜스>는 이러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현대미술은 커다란 흰 캔버스 위에 흰 선을 그린다거나(연극 <아트>) 변기를 예술 작품이라 부르기도 하는 등 너무나 다양하고 기발해서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현대음악, 현대미술 등 현대예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다양함을 알고 있는 2019년의 관객이라면 모리스가 보여주는 '미술에 빠져있는 천재'의 느낌이 과연 강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예컨대  연극 <레드>가 마크 로스코라는 인물이 가진 생각을 디테일하게 무대 위에 옮기며 오히려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던 것처럼 <달과 6펜스> 역시 미술에 대한 설정 등을 상세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관객들에게 시나리오의 탄탄함까지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러모로 재연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정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twoasone/)에도 실립니다.
달과6펜스 뮤지컬 예술지상주의시리즈 다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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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문화, 연극/뮤지컬 전문 기자. 취재/사진/영상 전 부문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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