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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참 많이 걸어 다녔다. 도시에서 자란 나만 해도 하루에 2~3시간 걷는 것은 예사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 물놀이를 가기 위해 왕십리에서 풀장이 있던 장충단공원이나 모래사장이 있던 뚝섬까지 걸어 다녔는데, 왕복하면 잰걸음으로 족히 2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물론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물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발품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비지땀을 흘리며 왜 그렇게 죽자 살자 걸어 다녔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버스비를 아껴 군것질을 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걷는 행위에 거부감이 없어서 일 것이다. 걷는 것은 일상이었지 않은가.

물론 시골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 때 외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읍내에서 2시간 동안 산과 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서울은 그래도 구경할 거라도 있지 그냥 하염없이 외삼촌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장날이면 외할아버지가 항상 걷던 길이었으리라. 하긴 농촌에서 학교 다닌 사람이 들으면 뭔 소리냐고 육두문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매일 그렇게 다녔는데 뭔 소리여!

사실 사람이 걷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이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고부터 두 다리로 수백만 년 동안 계속 걸어왔다. 당연했다. 걷는 것은 살기위한 본능이었기 때문이다. 경주마가 다리를 다치면 도살하듯 인간도 걸을 수 없으면 도태되었다. 노마드에게 걸음은 절대적이니까.

아브라함도 수년 동안 걸어서 메소포타니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대군단도 걸어서 발칸반도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대 페르시아 지역을 정복했다. 낙타나 말이나 마차 등 동물을 이용해 이동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특혜였을 뿐 보병들의 행보에 모든 일정을 맞추어야 했다.
  
연인산 비박촌 부근
▲ 연인산  연인산 비박촌 부근
ⓒ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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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은 운반 기계의 도움 없이 항상 걸어 다녔다. 걷는다는 것은 밥 먹는 것처럼 일상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느 누구도 걸음에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두 다리는 낙타의 다리처럼 강했다. 당연한 얘기를 왜 진지하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의 신체는 직립보행에 최적화되었다. 개에게 직립보행을 강요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사람의 신체 구조는 다시는 네 다리로 걸을 수 없게끔 이제 완벽한 형질화가 되어 있다.

개가 두 다리고 걸을 수 없듯 사람도 이제는 네 다리로 걸을 수 없다. 나무에 매달려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마시라. 아마도 여담이지만, 과학기술이 지금보다 수십 배 발달된 아주 먼 미래에 걷는 것을 포기한 인간은 다른 형태의 방법으로 신체를 이동시킬지 모른다.

과거에는 어떤 이해관계나 목적을 이루고자 걸었으나 요즘은 차를 이용한다. 강원도 산골 외딴 동네에 사는 사람도 마실에 나가려면 이제는 콜택시를 부르면 된다. 2시간 이상 걷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떤 용무 관계로 1시간 이상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심이나 시골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차가 있는데 굳이 걸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걸음걸이 수가 적어지면서부터 인간의 신체에 문제가 발생한다. 걸어야 하는 데 걷지 않으니 신체 리듬이 깨진 것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의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걸으십시오'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환자들에게도 무조건 걸으라 하고, 디스크나 고관절 환자에게도 걸으라고 하고, 암환자에게도 가장 좋은 운동이 걷는 것이라고 주문한다.

의사들은 만병통치약처럼 걸음을 처방을 한다. 걸음을 잃어버림으로 해서 발생한 각종 질병은 당연히 걷게 함으로 해서 치료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의과적인 방법론이다. 내 몸을 학대하면 그만큼 질병을 만드는 것이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대 순서를 밟아야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공휴일에 한강 고수부지나 근교 둘레길에 나가 보면 각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걷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디론가 열심히 걸어간다. 하나의 공통점은 걸음에 대해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나들이하는 가벼운 발걸음이든, 병의 치료를 위한 목적이든, 보다 강한 몸을 만들기 위함이든 그들 모두 걷는 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자의든 타의든 구들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상 외로 많다. 바특이 있는 내 아이들과 친구만 보더라도 자의로 걷는 사람은 없다.

걷기는 의지력 하나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하지만 금연에 성공하기 전에 수많은 작심삼일을 거듭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걷기도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쉬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믿을 게 못된다. 자신의 몸에 어떤 위험한 경고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니코틴이 몸에서 거부를 해야 금연을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걷는 것도 어떠한 계가가 있어야 몸에 천착시킬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는 길은 지난하기 마련이다.

처음엔 치료의 목적이나 잃어버린 건강과 체력을 얻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충격요법이다. 몸이 건강하면 걷는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마련이다. 무언가 절박함이 있어야 접착력이 강해진다. 설렁설렁 마음먹으면 도로아미타불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게 시작한 걷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익숙해진다.

아마도 일 년 이상은 지속적으로 해야 걸음이 일상이 된다. 몇 달 걷다가 별 효과가 없으면 포기를 많이 하는데 금연처럼 그 고비를 넘어야 한다. 그 지루한 과정을 거치면 이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게 아니라 당연히 걷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월래 걷는 인간이기 때문에 몸은 거부하지 않는다.

걷기는 본연의 나로 찾아가는 길이다. 내 신체는 그것을 갈구한다. 걷게 해 주어야 몸은 편한 것이다. 한발 한발 디딜 때 그 울림은 무릎과 대퇴부와 위장과 심장을 거쳐 머리까지 울라가 파동을 일으킨다. 그 울림은 수천억 개의 세포에 전달되어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생산하게 한다.

그러한 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오래된 낳은 에너지를 새로운 에너지로 대체된다. 몸에 평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리라. 그런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잠시 잊고 있는 생체 리듬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리라. 마음에 평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몸의 평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진정한 합치의 평화를 만끽할 것이니까.

부처도 처음엔 깨닳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보리수 아래를 걸음으로서 몸에 평화를 주었다. 가령 설악산 봉정암이 왜 그토록 깊은 산중에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마을에서 20km가 넘는 길은 거칠고 길지만 그 거리를 걸어서 통과함으로써 얻는 적당한 노고와 몸의 평화를 체득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넣을 수 있는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산속에 있는 절집은 기본적으로 불도들의 걷기 수행을 요구한다. 몸이 평화롭지 않다면 깨달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법이다. 몸이 무겁고 탁한 상태로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행 방법이 될 수 있겠는가. '선방일기'라는 얇은 불교 교양서적이 있는데, 동안거를 하기 위해 겨울 초입 진부에서 상원사까지 눈 덮인 오십 리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첫 장에 나온다. 오십 리 길의 걸음은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일종의 예식인지 모른다.

걸음에 마음을 접목시키는 행위는 불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라는 종교적인 행위는 중세 때부터 성행했다. 물론 순례는 걸음을 요구한다. 걸어서 가기 애매한 경우는 자동차를 이용하지만 많은 경우의 순례길은 걸어서 한다. 대표적인 순례길이 유럽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장장 800km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가야 하는 코스이다.

가톡릭 신자들은 영성의 회복 같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걷고, 무신론자들도 자신의 어떤 영적인 각성이나 오염된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걷고, 때론 관광 차원이나 그저 걷는 게 좋아서 걷는다. 개개인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어쨌든 적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매일 걷는다.

그렇게 매일 하염없이 걷다 보면 지루함과 체력적인 문제로 심신이 고단해지고 그러므로 해서 처음의 목적은 희석된다. 몸과 마음에 알 수 없는 방정식이 만들어지며 자연히 본능적으로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물론 화두처럼 그 방정식의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걸음은 그 어떤 목적도 없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르듯,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걸을 뿐이다. 거만하고 멋 부리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 만한 표현을 애써 감춘다는 것도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등반은 자신과의 힘든 싸움이며 그래서 작가가 한 편의 작품을 탈고하듯 어떤 성취감을 얻기 위함이지만, 길을 걷은 것은 그 어떤 보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등반처럼 힘들지도 않고, 순례자처럼 고뇌하지도 않으니 욕망이 클 수 없다. 보상을 원한다면 걷기보다 등반을 해야 적당하고 그것이 체력적으로 힘들다면 둘레길을 걸어야 옳다. 무색무취의 길을 걸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을 찾아 나선다.
  
가평 백둔리로 가는 길
▲ 연인산 가평 백둔리로 가는 길
ⓒ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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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과 버스를 타고 산으로 들어갈 때면 친구를 만나러 가듯 설레기도 한다. 때론 걸어서 가기도 하고 때론 하루에 몇 대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타고 산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비포장 들머리 경사면을 조금만 오르면 허리를 끼고도는 텅 빈 산판길과 만난다. 흔히 임도라고 불리는 산판길은 웬만한 산에는 산불 산림관리 관계로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왔다. 그보다 오래전에는 화목을 목적으로 하는 길 즉 산판길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톤 화물차 한 대 다닐 정도의 흙길에 잡초가 무성하다. 그 길은 산 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끝없이 이어진다. 때론 그늘이 지기도 하고 때론 뙤약볕을 피하지 못하기도 한다. 능선길이 아니다 보니 조망이 좋을 리 없다. 그저 흙길을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두 다리가 힘들면 햇볕을 피해 걸음을 멈추고 길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신다. 일행이 있다면 담소를 나누고 혼자라면 침묵과 함께하면 된다. 위아래에서 밀려오는 산의 침묵이 느껴진다. 산이 높을수록 그 침묵의 무게는 두텁게 느껴지리라. 대처에서 가져온 상념은 그 침묵에 꼬랑지를 내린다.

때론 그렇게 걷고 싶다. 그래, 그렇게 텅 빈 산판길을 홀로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주말에 작은 배낭 하나 매고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산이 나를 오라 하지도 않고 반기지도 않지만 산객은 묵묵히 흙길을 걷는다.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 그는 고독하지 않다. 고독을 느낀다면 이렇게 산을 배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은 위에서 홀로 걷는 그에게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렇게 이죽거린다. 뭐하는 놈이여?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응대한다. 긍께 신경 끄시오 잉!

태그:#걷기,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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