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 JTBC

 
"엄마였어. 평생 내 앞의 눈을 쓸어준 게 엄마였어."

아들(안내상)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없이 되물었던 삶의 진실을 마주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끝없이 몰려 왔다. 쏟아지는 눈물이 얼굴을 뒤덮은 지 오래였다. 유독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아들이었다. 감정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는지 모르겠다.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고, 의족에 기대 사는 삶은 그만큼 고되고, 외로웠다. 아들은 오열했다. 깊은 울음이었다. 가슴 깊이 박혀 있던 무언가를 뱉어내듯 울어냈다. 회한이었을까. 

"내가 싫지? 엄마는 내가 귀찮지? 엄마는 내가 확 죽었으면 좋겠지? 엄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어린 시절, 아들은 엄마(김혜자/한지민)에게 거칠게 따져 물었다. "불쌍이 밥 먹여주냐. 돈 주냐. 그럼 불쌍하다고 해 줄게." 답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결론은 이미 제멋대로 내려져 있었다. 엄마는 왜 나를 미워하는 걸까. 어째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을까. 저리도 냉담한 걸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는 알까. 아들은 그런 엄마를 매일같이 원망했다. 그날의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내가 왼쪽 다리를 잃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나를 향해 웃어줬을까. 우리는 '행복'했을까.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 JTBC

 
눈이 오는 어느 날, 요양원에서 엄마가 사라지는 소동이 벌어졌고, 아들은 엄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손에 빗자루를 쥔 채 쌓인 눈을 쓸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왜 저러고 있는 걸까.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다리가 불편해서 학교 가야 되는데 눈이 오면 미끄러워서." 그제서야 아들은 깨달았다. 매번 옆집 아저씨가 눈을 치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름 아니라 엄마였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아, 왜 이제서야 안 걸까. 

"아들..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아들만 미끄러지지 않으면 돼요."


엄마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눈 오는 아침마다 아들의 등굣길을 말없이 돕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령 아들이 모른다 해도 괜찮다고 했다. 아들은 점점 심해지는 알츠하이머 때문에 자신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를 전한다. "한번도 안 넘어졌대요. 눈 오는 날에 한번도 넘어진 적 없대요." 그제서야 엄마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밝은 미소를 짓는다. "정말이에요? 아, 다행이에요."

19일 방송된 JTBC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는 앞선 회가 그랬던 것처럼 눈부심의 연속이었다. 요양원의 '도라에몽 할머니'는 막냇딸 은숙을 눈앞에 그려내고서 그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다음에도 엄마 딸로 태어나면 안 되겠어? 그때는 엄마가 한번 해봤으니까 정말 정말 잘해줄 수 있을거야." 아내를 먼저 보낸 할아버지는 딸에겐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직 아내의 온기가 남아있는 침대에서 홀로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또, 평생 고생만 하며 살아 왔던 며느리(이정은)에게 "미안하다"면서 "이제 넌 네 생각만 하고 살아. 그래도 돼. 남편도 자식도 훌 벗고 너로 살아"라고 말하는 혜자. 그는 "나는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늘 네 편이다"리는 말로 기어코 며느리뿐만 아니라 시청자들까지 울렸다. 그 대사가 앞서 어떻게 쓰였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한 편의 드라마가 줄 수 있는 감동의 깊이, 그 끝은 어디일까.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 JTBC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억지로 끼워맞춘 퍼즐이 아니었다. 모든 아귀가 절묘히 맞아떨어졌다. 한 장면도 허투루 만들어진 게 없었다. 사소한 대사 하나까지도 그냥 쓰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완성된 퍼즐이 워낙 걸작이라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완벽한 완성도였다. 처음에 <눈이 부시게>를 만났을 때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다. '혜자의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슬펐지만 유쾌했고, 진지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10회 말미, 웃음기 가득했던 '준하 구출작전'이 끝나고 석양을 바라보던 '할벤저스'의 모습 뒤로 이어진 혜자의 '고백'은 모든 걸 뒤흔들었다. 드라마의 전개와 관점, 심지어 주제까지 뒤바꿨다. 그 반전 앞에 시청자들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 드라마가(이 작가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드러난 것이다. 시계를 돌려 벌어진 판타지가 아니라, 알츠하이머로 인한 기억 왜곡이었다니! 혜자의 상상이 만들어 낸 이야기였다니! 

단순히 '늙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 청년과 극명히 비교되는 '노년'과 그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는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산산조각 났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수작(秀作)이었다. <눈이 부시게>는 25세 혜자와 70대 혜자를 절묘히 섞으며, 그 주제들을 영리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혜자가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눈이 부시게>는 차원을 달리하는 드라마가 됐다. 말할 수 없이 경이로웠다.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 JTBC

 
'알츠하이머'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기억의 이야기'으로 환원했고, 행복했던 기억을 움켜쥐고 그 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들의 간절함으로 바꿔버렸다. 이 얼마나 시적이고 아름다운 해석인가. 노년을, 늙음을, 알츠하이머(치매)를, 이토록 절실히 다뤘던 드라마가 또 있었던가. 무엇보다 <눈이 부시게>는 그것들을 '타자'로 다루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다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배우들의 열연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한지민, 남주혁, 손호준, 김가은, 송상은, 이정은, 안내상, 김희원 등 주조연과 단역 할 것 없이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완벽했다. 또 '할벤저스'를 구성했던 배우들도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열정은 그득하지만, 기회가 없었을 그들에게 <눈이 부시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김혜자는 그 자체가 감격이었다. 그는 25세 김혜자, 70대 김혜자,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김혜자를 완벽히 그러냈다. 

<눈이 부시게>와 함께 했던 두 달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위대한 드라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앞으로의 삶에 큰 버팀목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김혜자가 들려준 '인생 예찬'을 나누고 싶다. 그로부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부디 이 드라마를 시청했던 모든 이들에의 마음 속에 '행복'이 깃들길 소망해 본다. 당신이 지치고 힘들 때, 언제라도 '행복 미용실'을 떠올리길 바란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하루가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했던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은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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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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