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2년 가까이 머물다 귀국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내가 쓰는 언어, 내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이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일치한다는 느낌이 참 편안했다. 사실, 캐나다에 가기 전까지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감'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었다. 온통 한국 사람들 속에만 있으니 내가 하는 모든 행동방식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는 달랐다. 여행 온 것처럼 설레기만 했던 처음 몇 달과, 캐나다의 모든 것이 좋아보였던 그 다음 몇 달을 지낸 후 나는 주변의 이웃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이곳에선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처음으로 '소수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했고, 한국인만의 '문화적 정체감'이 존재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런 면에서 캐나다 국영방송 CBC의 시트콤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은 특별했다. 현재 넷플릭스와 TV조선을 통해 국내에서도 시청 가능한 <김씨네 편의점>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국 이민가족의 일상이 소재다. <김씨네 편의점>에서는 한국이었다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을 한국인만의 특성들, 즉 문화적 정체감이 중요한 사건들을 일으킨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막 문화적 정체감에 눈 뜬 내게 나와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주었다.
 
 <김씨네 편의점>의 주요인물들. 왼쪽부터 아들 정, 엄마 미세스 김, 아빠 김씨, 딸 재닛. 그리고 정의 친구 김치와 직장상사 셰넌.

<김씨네 편의점>의 주요인물들. 왼쪽부터 아들 정, 엄마 미세스 김, 아빠 김씨, 딸 재닛. 그리고 정의 친구 김치와 직장상사 셰넌. ⓒ CBC

  
따뜻한 '꼰대' 아빠, 김씨

드라마의 주요 무대는 한국에서 이민 온 김씨(폴 선형 리)가 운영하는 토론토의 한 작은 편의점이다. 드라마의 오프닝 장면마다 등장하는 이 편의점의 간판에는 한국인의 성실성을 상징이라도 하듯 '7days a week'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주 7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문을 연다는 뜻이다. 20년 동안 아들인 정(시무 리우)이 아팠을 때 딱 한번을 빼고는 문을 닫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김씨. 그는 이 가게의 주인이자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아내 미세스 김(진윤)의 남편이자, 아들 정, 딸 재닛(안드레아 방)의 아빠이다.

이런 김씨는 소위 말하는 '꼰대'다. 시즌1, 첫 회부터 그는 동성애자 특별할인을 시행한다며 누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내가 게이다'라도 말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은 게이처럼 생기지 않았다'며 할인을 해주지 않고, 자신이 게이라고 판단한 사람에게는 '게이가 아니다'라고 말해도 '게이가 맞다'고 우기며 할인을 해준다. 자신의 판단만 믿고 타인의 말은 잘 듣지 않는 그는 가족들에게 걸핏하면 'Stop'이라고 외치며 통제하려 든다. 아내나 딸에게 실수를 해도 절대로 '미안하다'라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손님들과도 종종 다투지만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다.

모든 감정을 '윽박지르기'로 표현하는 김씨의 모습은 가부장의 전통을 따르는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꼰대' 아빠는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다. 강한 척하다 가족에게 소외당하고 외로워하는 모습, 자신의 약점이 드러났을 때 겸연쩍어 하는 모습 등은 우리 아버지들의 속마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시즌1 마지막 회는 가족합창대회에 "절대 안 나간다"고 큰소리친 김씨가 가족들 몰래 무대 뒤에서 화음을 넣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마음에 품은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온 한국의 아버지들을 대변하는 듯한 이 장면에서는 코 끝이 찡해왔다.

자녀가 최우선인 엄마, '미세스 김'

극 중 김씨의 아내 미세스 김은 자녀들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하는 엄마다. 편의점의 일을 돕고, 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지만 무엇보다 성인이 된 자녀들의 이성교제에 관심이 많다. '교회 다니는 한국남자'와 딸을 맺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아들의 여자 친구 문제에도 적극 개입한다.

또한 아버지 김씨와 사이가 좋지 않아 가출한 아들 정이 다니는 회사에 불쑥불쑥 찾아가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한다. 아들의 승진 문제를 두고 아들의 직장상사를 찾아가는가 하면, 아들과 룸메이트가 둘이 사는 집에 연락도 없이 찾아가 반찬을 냉장고 가득 채워 넣어 준다. 교회에서는 같은 한국인인 박씨네 가족과 종종 경쟁하는데 자존심 대결의 주요 주제는 아이들의 학교성적과 직장 내 승진문제다.

아마 이 드라마가 한국을 배경으로 했더라면, 이 같은 어머니의 성격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보편적인 모습이라 사건을 일으킬 만한 소재가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캐나다 토론토가 배경인 <김씨네 편의점>에서는 엄마 미세스 김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중요한 사건들의 원인이 된다. 자녀들의 학업적 성취보다는 독립적인 삶을 응원하는 캐나다에서 자녀의 이성교제까지 관여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매우 특별한 것일 테니 말이다.

두 개의 정체성을 지닌 이민 2세대, 정과 재닛

한편, 카센터에서 일하는 아들 정과 사진학과에 다니는 딸 재닛은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민 2세대다. 이들은 한국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한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전혀 없다. 캐나다의 학교 시스템 속에서 자란 이들은 한국보다 캐나다의 정체감에 훨씬 더 익숙하다.
 
우선, 이들은 영어 발음부터가 다르다.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부모에 비해 정과 재닛은 완벽한 원어민의 영어를 구사한다. 또한,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도 강하다. 정은 아버지와의 불화로 이미 독립해 친구와 함께 살고 있고, 재닛은 수시로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한다. 성인이 된 후라도 자녀의 일상을 보살피고자 하는 한국의 정체감을 가진 부모와 독립적인 개인의 생활을 중시하는 캐나다의 정체감을 진 자녀와의 갈등은 극의 큰 줄기다.

하지만, 재닛과 정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감 역시 소중하게 생각한다. 정은 친구와 사는 집에 태극기를 걸어두고 지낸다. 한국의 사촌 나영의 방문기를 다룬 시즌1의 4회에서 재닛은 "너는 한국에 가보지도 않았잖아"라는 캐나다 친구들의 핀잔에, "나도 한국인이니까 다 알아"라고 발끈하며 반박한다. 이는 캐나다인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한국에서 찾고 싶은 이민 2세 젊은이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대목이었다.

캐나다인들의 따뜻한 시선

사실 드라마 <김씨네 가족>의 한국식 사고와 행동은 캐나다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가치에 위배되는 것들이 많다. 캐나다인들은 자신들의 이민과 사회통합 정책을 '모자이크'라고 표현한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각자의 문화적 정체감을 유지하며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필자가 2년 전 캐나다에 막 도착해 아이와 함께 교육청의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을 때 담당자는 '모국어를 잃어버리면 아이의 정체감에 혼란이 오니 가정에서는 각 나라의 모국어를 사용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드라마 속 김씨네 편의점에 방문하는 손님들만 봐도 중국계, 남미계, 아프리카계, 무슬림 등이 모두 문화적 정체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또한, 성소수자들도 종종 손님으로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자신들의 정체감 표현에 망설임이 없다. 이들 모두가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고 존중받으며 어울려 사는 곳이 캐나다다. 이런 캐나다인들에게 아빠 김씨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고집을 피우는 대목은 조금은 낯선 장면이었을 것이다.

또한, 캐나다는 가족공동체나 집단의 가치보다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자녀의 이성 친구를 골라주고, 가게를 물려받을 것을 강요하는 부모의 태도는 매우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자녀에게 윽박지르거나 꿀밤을 먹이는 정도의 훈계 역시 캐나다에서는 '폭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즌1의 6회에서 아버지 김씨가 재닛에게 꿀밤을 먹이는 장면을 본 재닛의 지도교수가 크게 놀라는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바라보는 캐나다 이웃들의 시선이 따뜻하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 재닛의 친구들은 매번 아버지 김씨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김 씨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른 캐나다인 손님들도 김씨의 독특한 행동을 그저 하나의 특징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는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캐나다인들의 열린 자세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즌1의 8회 "서비스를 받는 게 불편하지만, 문화는 존중하고 싶어요"라는 부담임 목사의 대사는 캐나다인들이 다른 문화를 대할 때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준다.  

캐나다 현지 언론들은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을 '웃음'이라고 분석했다. 아마도 TV 시리즈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던 한국인만의 사고와 행동이 웃음을 자아냈을 듯하다. 하지만, 한국인인 난 그냥 웃어 넘기기엔 힘든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무엇인가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숲 안에서는 숲의 모습을 알 수 없듯, 한국 안에서는 우리의 문화적 정체감을 인식하기 힘들다. 하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그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때문에 태평양 건너편 <김씨네 편의점>에 고스란히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색달랐고, 유쾌하면서도 뜨끔했으며, 감동적이면서도 때론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보고 싶다면, 캐나다의 한국 가게 <김씨네 편의점>에 들러보자. 꼰대 같은 아빠, 참견 많은 엄마가 숨겨둔 마음 속 사랑이 느껴질 것이다. 또한, 독립을 원하면서도 어른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젊은 청년들의 마음 또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인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엿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김씨네 편의점>은 어떤 드라마
캐나다 국영방송인 CBC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은 실제 어린 시절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한 이민 1.5세대 한국인 최인섭씨의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다. 최씨는 요크대에서 미술과 연극을 전공한 후 토론토 소울페퍼 극단에 합류했는데 그가 2011년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이 바로 <김씨네 편의점>이다.

연극 <김씨네 편의점>은 2012년 토론토 연극비평가협회에서 최고의 연극상과 최우수 연극배우(김씨의 역의 이선형)상을 수상할 만큼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이후 캐나다 전역에서 무대에 오르며 인기를 모았다.

이 연극을 유심히 보던 CBC 관계자는 드라마 제작을 요청했고, 2016년 CBC를 통해 시즌1이 방송됐다. 북미 지역에서는 드물게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해 관심을 받았고, 많은 시청자들이 호평을 했다. 2017년 9월에는 시즌2가 캐나다 전역에 방송됐고, 올 초부터 시즌3가 방송되고 있다. 2018년 3월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캐네디언 스크린어워드'에서 베스트 코미디 시리즈 부문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김씨 역의 폴 선형 리는 이선형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인 이민자이며 어머니 역의 윤진 역시 윤진희라는 한국이름을 가지고 있다. 딸 재닛 역의 안드레아 방도 한국계 캐네디언 배우다. 아들 정 역의 시무리우는 중국 출신의 배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에도 실립니다.
김씨네편의점 한국인 문화적정체감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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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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