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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도 베를린과 가까운 곳에, 우리에겐 베를린만큼이나 유명한 도시가 하나 있다. 요즘에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중고등학교 역사 시험 때 시대순 배열 문제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던 그 이름. 바로 포츠담이다.

수업 시수가 모자라 진도에 쫓긴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회피한 건지는 알 길 없지만, 학년 말 역사 수업은 늘 포츠담 언저리에서 끝이 났다. 해방 이후 현대사 부분은 중고등학교 시절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대개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책을 통해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흐릿한 기억을 끄집어내 보자면 시험 문제는 늘 이랬다. 카이로 선언, 얄타 회담, 포츠담 선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배열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맥락도 모른 채 무작정 연도를 달달 외워야만 했다.

해방을 한 달쯤 앞둔 1945년 7월 말,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패전국 독일의 포츠담에 모여 전후 독일과 일본의 처리 문제를 결정했다. 히틀러가 자살하는 등 이미 독일은 항복을 선언한 상태였고, 일본 역시 패색이 짙어가던 때였다. 전후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실상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포츠담 선언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선언문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지만, 일본이 거부하면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 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연이어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이다.

두 차례의 원폭 투하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지만, 미소 냉전과 체제 경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일촉즉발의 미소 냉전 최전선에 우리나라가 서 있었다. 동서로 양분된 독일과는 달리, 전쟁 도발과 패전의 책임을 엉뚱하게도 일본이 아닌 우리가 대신 지게 됐다. 그 결과가 바로 남북 분단이다.

역사적인 포츠담 선언의 현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도시가 마을처럼 아담한 데다 베를린과 전철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나절이면 여유롭게 다 돌아볼 수 있다. 도시 내에서도 트램과 버스 노선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 교통으로 인한 불편함은 없다.

포츠담 회담 열린 곳, 생각보다 누추하네
 
독일 제국 황태자의 궁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전역을 통틀어 가장 보존이 잘 된 건물이었다고 한다.
▲ 체칠리엔 호프 전경 독일 제국 황태자의 궁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전역을 통틀어 가장 보존이 잘 된 건물이었다고 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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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담 회담이 열린 곳은 시내에서 버스로 10여 분 남짓 거리의 조그만 호숫가에 자리한 체칠리엔 호프다. 독일어로 '체칠리아가 살던 집'이라는 뜻이다. 안내 책자에는 궁전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빌헬름 황태자와 그의 부인인 체칠리아를 위해 지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굳이 궁전이라 부르기에는 어색한 규모다. 그저 왕실의 여름 별장 정도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여느 궁전들처럼 대리석으로 된 열주도 없고 내부 장식이 딱히 화려한 것도 아니다. 튼실한 석축 위에 지어 올린 검박한 2층의 목조 건물일 뿐이어서, 이름만 듣고 온 여행자들은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다. 명색이 독일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위한 궁전이라기엔 너무 누추해 보이기 때문이다.
 
회담장과 바로 인접해 있는데다 체칠리엔 호프 내에서 가장 넓은 곳으로, 당시 스탈린의 위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 당시 스탈린의 집무실 회담장과 바로 인접해 있는데다 체칠리엔 호프 내에서 가장 넓은 곳으로, 당시 스탈린의 위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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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곳으로,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수차례 모여 외교전쟁을 벌인 현장이다. 당시 그들이 앉았던 테이블과 의자가 그대로 남아있다.
▲ 포츠담 회담이 열린 곳 역사적인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곳으로,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수차례 모여 외교전쟁을 벌인 현장이다. 당시 그들이 앉았던 테이블과 의자가 그대로 남아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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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인즉슨 이렇다. 이 궁전이 지어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0년대 후반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재정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궁전이 애초 계획과는 다르게 소박해진 것이다. 그나마 1917년 완공된 직후, 황태자는 패전의 멍에를 쓰고 네덜란드로 망명해야 했으니, 이곳의 주인은 처음부터 건물의 이름으로 남은 체칠리아 태자비였던 셈이다.

독일 제국의 패망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으로 '평민'이 된 황태자 내외는 왕실의 재건을 도모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권력을 쥔 히틀러에게 접근했다가 좌절된 뒤 체칠리엔 호프를 영영 떠났고, 궁전은 주인을 잃은 채 이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하여 이곳은 1871년 독일 제국의 왕실로 굳건했던 호엔촐레른가의 마지막 궁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외진 이곳에서 역사적인 회담이 열린 이유는 뭘까.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전역에 변변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0년 대 초 연합국 공군의 융단 폭격으로 독일의 거의 모든 도시가 잿더미로 변했다. 서민들의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수백 년도 넘은 육중한 성당과 중세 시대 성벽조차 대부분 허물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체칠리엔 호프만큼은 당시 폭격을 피해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이웃한 포츠담 시내 전역이 융단 폭격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생각할 때 천우신조라 할 만하다. 작고 소박할지언정 당시 이만한 궁전은 독일 어디에도 없었기에, 연합국 세 나라의 수뇌가 대규모 수행단을 이끌고 굳이 이곳에 모인 것이다.

이곳에선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독일의 수많은 관광지들 중에 한국어를 지원하는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도로표지판과 관광 안내판에 영어조차 병기하지 않는 곳이 숱한 마당에 언감생심일 테지만, 중국어와 일본어가 대부분 제공되는 것에 견준다면 아쉬움이 크다.

이유라면 이것저것 따져볼 것 없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곳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한 독일인은 독일의 사례를 들어 남북 분단의 이유와 현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이방인 여행자를 오랜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통일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위대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다만, 그는 체칠리엔 호프를 찾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지 않다는 게 의아하다고 했다. 찾아간 그날도 한국인은 혼자였고,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지만 우리나라 관광객은 만날 수 없었다.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공부만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순간 멋쩍어졌던 이유다.

포츠담을 찾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적은 건 아니다. 일단 베를린에 왔다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필수 코스다. 다만, 목적지가 다를 뿐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한 상수시 궁전만 둘러보고 돌아간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궁전을 품고 있는 포츠담보다 더 유명한 이름이 됐다.

포츠담에 가거든, 꼭 가보시라
 
프리드리히 대제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세운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로, 상수시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의미다.
▲ 포츠담 관광의 중심, 상수시 궁전 프리드리히 대제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세운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로, 상수시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의미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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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로코코 양식의 상수시 궁전과 나무 기둥조차 녹슬어 보이는 퇴락한 체칠리엔 호프는 여러모로 대조되는 건물이라 함께 둘러볼 만하다. 트램과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도 될 만큼 교통 여건도 좋아 배낭여행자들에게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도 찾는 발길이 뜸한 건 우리 현대사에 대한 관심 부족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체칠리엔 호프에 남아 있는 세 나라 수뇌의 흔적 중에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스탈린이다. 사실상 포츠담 회담을 주도했던 당시 미국과 영국 두 나라를 손에 쥐고 흔들 만큼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담의 파트너였던 두 나라의 수뇌는 도중에 사망하거나 실각하여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처지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에 숨을 거두었고, 영국의 수상 처칠은 선거에 패배해 전권을 후임인 클레멘트에게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과 얄타 회담 등 일련의 논의 과정을 훤히 꿰고 있던 스탈린에게는 꽃놀이패였던 셈이다. 전후 독일의 동서 분할 등 국제 질서 재편 과정에 소련의 입김이 강력했던 이유다.

그의 집무 공간은 다른 두 수뇌의 방보다 훨씬 넓고 화려하다. 회담장과의 거리도 가깝고, 경호와 보안에도 유리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오로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1만 명에 이르는 경호 병력을 이끌고 왔다고 전해진다.

옛 회담장에 들어서자 원탁 한가운데에 놓인 세 나라의 빛바랜 국기가 눈길을 끈다. 국기는 물론, 루스벨트를 이은 트루먼과 처칠, 스탈린이 각각 앉았던 팔걸이의자와 통역사와 수행원들이 썼던 책상까지도 당시의 것 그대로라고 한다. 서너 평 남짓의 비좁은 이 공간에서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있는 분단의 모순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체칠리엔 호프엔 여객선의 선실처럼 꾸민 응접실을 제외하곤 정작 주인인 체칠리아의 자취는 단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 각 방은 처칠의 집무실과 스탈린의 서재 등 남의 이름 차지가 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비록 패전국의 궁전일지언정, 언뜻 서세동점의 시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모습과 겹쳐 겨울 독일의 날씨 마냥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부디 포츠담에 가거든 아름답고 화려한 상수시 궁전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성찰하게 만드는 체칠리엔 호프에 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들러볼 일이다. 가슴에 슬픔을 아로새기고 묵직한 역사적 교훈을 담아가는 여행도 나름 소중한 경험이 된다. 상수시 궁전이 프랑스어로 '아무런 근심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니 공교롭기 그지없다.

태그:#포츠담 선언, #체칠리엔 호프, #냉전, #원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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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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