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방송된 3.1운동 100주년 특집 프로그램에서 친일 음악인의 노래를 방송해 논란이 되고 있다.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편에서 친일 부역 음악인 박시춘(1913~1996)이 만든 '비 내리는 고모령'이 방송된 것이다.

(관련 기사: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비 내리는 고모령'이 무슨 문제냐고?
 
 KBS-2TV <불후의 명곡> 삼일절 특집 프로그램에 친일부역 음악인 박시춘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이 방송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KBS-2TV <불후의 명곡> 삼일절 특집 프로그램에 친일부역 음악인 박시춘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이 방송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 KBS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이 1949년에 발표한 노래('낭랑 십팔 세', '신라의 달밤', '럭키 서울') 가운데 하나다. 고모령(顧母嶺)은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인데, 이름처럼 '어머니를 돌아보는 고개'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로 시작하는 노래의 울림은 꽤 깊어서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징병이나 징용 가는 아들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라는 얘기를 듣고 그 사연을 담아 지은 노래라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이 노래를 즐겨 불렀던 이 가운데, 고모령이 어딘지 알았던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고모령의 소재 따위보다는 이 노래에서 드러나는 모자의 애틋한 이별에 더 공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만으로는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작곡자 박시춘의 일제 강점기 전력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박시춘의 고향은 밀양으로 본명은 박순동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친의 신병 치료로 가세가 기울어 보통학교도 중도에 그만두었다. 따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악기 연주에 뛰어났고 10여 년 여러 공연단체 소속으로 유랑생활을 하면서 음악 능력을 길렀던 모양이다.

1935년에 박시춘이라는 예명으로 데뷔해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불망의 글자'(1937), '애수의 소야곡', '왕서방 연서', '앵화폭풍', '꼬집힌 풋사랑', '총각 진정서', '남장미인', '기로의 황혼', '눈물의 춘정'(1938), '세상은 요지경', '감격시대', '안개 낀 상해'(1939) 등이다.

이후에도 그는 '울며 헤진 부산항', '쓸쓸한 여관방', '선부의 아내', '눈 오는 네온가'(1940), '무정천리', '집 없는 천사', '인생 출발'(1941), '천리 정처', '목단강 편지', '내 고향', '청년 고향'(1942), '황포돛대', '서귀포 칠십리'(1943) 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해방 후 세대라 해도 눈과 귀에 익은 곡이 적지 않다.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울며 헤진 부산항', '황포 돛대' 등은 지금도 즐겨 불리는 노래기 때문이다. 1943년까지 박시춘이 발표한 작품 수는 확인되는 것만 270곡 이상이라니 작곡가로서 그는 전성기를 누린 셈이다.

그러나 중일전쟁(1937) 이후, 진주만 기습(1941)으로 태평양전쟁을 개전하게 되는 1930~40년대는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이 본격화한 때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1938)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전쟁 수행을 위해 노동력과 물자 등을 수탈하고 이를 전쟁에 동원하여 수행하는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군국가요의 원죄

일제는 대중음악계에도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목적의 상업적인 대중가요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목적에서 상업적으로 생산, 유통 과정을 거쳐 공급된 대중가요가 이른바 '군국가요'다. 

이 군국가요는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대중으로부터 거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식민지 압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대중들은 달달한 대중음악에 환호하곤 했지만, 일제의 논리와 의도 따위는 간파하고도 남았다는 얘기다.
 
 작곡가 박시춘이 만든 군국가요. 현재 확인된 것만 13곡이다. 그는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작곡가 박시춘이 만든 군국가요. 현재 확인된 것만 13곡이다. 그는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 장호철

 
1940년대 이후 공급된 군국가요는 행진곡 형식인 일본의 군국가요와 달리 모성을 강조하는 노래가 많았다. 즉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군국의 어머니'야말로 진정한 모성(母性)이라고 선동한 것이다. 대표적 군국가요로 '지원병의 어머니'(조명암 작사, 고가 마사오 작곡, 장세정 노래)가 있는데 이는 일본 군국가요 '군국의 어머니(軍國の母)'를 번안한 것이었다. 

그밖에 '모자 상봉'(조명암 작사, 노시로 하치로 작곡, 백년설 노래), '아들의 소식'(함경진 작사, 한상기 작곡, 옥잠화 노래) 등과 함께 박시춘의 '아들의 혈서' 등이 있었다. (참고: 민족문제연구소, "〈군국가요 40선〉 제작에 얽힌 사연을 듣다")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악극단에서 연주와 지휘를 맡고, 남성 보컬 팀으로 무대에 직접 서기도 한 박시춘은 이 무렵 서른이 채 되지 않았지만, 작곡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고 있었다. 1939년부터 1940년 사이에 그는 3권짜리 <박시춘 기타 작곡집>을 펴내기도 했다.
 
 박시춘은 1940년대에 확인된 것만 13곡의 군국가요를 작곡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박시춘은 1940년대에 확인된 것만 13곡의 군국가요를 작곡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 EBS 화면 갈무리

 
박시춘이 작곡한 군국가요는 1942년 '고성(古城)의 달', '남쪽의 달밤', '낭자일기(娘子日記)', '병원선(病院船)', '아들의 혈서', '아세아의 합창', '즐거운 상처', '진두(陳頭)의 남편' 등 8편, 1943년 '결사대의 아내', '옥 퉁소 우는 밤', '조선해협', '지원병의 집', '혈서지원' 등 5곡으로 모두 열세 곡 정도가 확인된다. 

노골적인 악용

이들 군국가요는 일제 말기 전시 체제하에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동원'을 독려하는 선전과 선동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그것은 '혈서', '진두(陣頭)' '결사대'와, '지원병' 등의 제목에서부터 전쟁과 희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찬양하고 있다.

'조선해협'은 1943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조선해협>의 주제가이며, '혈서지원'은 '조선 징병제실시 축하 기념'으로 만들어져 조선 지원병실시 기념 음반에 수록된 노래였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日章旗) 그려 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 
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 
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 

나라님 허락하신 그 은혜를 잊으리 
반도에 태어남을 자랑하여 울면서 
바다로 가는 마음 물결에 뛰는 마음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반도의 핏줄거리 빛나거라 
한 핏줄 한 나라 지붕 아래 은혜 깊이 자란 몸 
이때를 놓칠쏜가 목숨을 아낄쏜가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대동아(大東亞) 공영권(共榮圈)을 건설하는 
새 아침 구름을 헤치고서 솟아 오는 저 햇발 
기쁘고 반가워라 두 손을 합장하고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 '혈서지원' 전문"


'혈서지원'은 노랫말대로 일본군 병정으로 지원하기를 소원하는 조선 청년의 노래다. '해군 지원병'을 뽑는다는 '감격'적 소식을 듣고 '나라님의 병정 되기'를 소원하는 이 청년은 '손끝을 깨물어서' 혈서를 쓰는 것이다. 이 노래는 당대의 인기 가수였던 남인수와 백년설, 박향림이 함께 불렀다. 

청년은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한 핏줄 한 나라 지붕'이라 하여 내선일체를 내면화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는' 아침을 합창하면서 맞는 그는 이미 일제가 기대해 마지않는 충용(忠勇)한 황국신민이 되어 있다. 

'즐거운 상처'는 노랫말에서 드러나듯 '님에게 못다 바친 목숨'을 슬퍼하는 부상병의 노래다. 병상에 누워서 이 병사는 '님에게 바치자는 등불'을 바치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그는 '상처로 돌아온 몸' '나머지 팔다리에 불을 붙일까' 고민하며 '전지(戰地)'에 가고 싶어 눈물짓는 것이다. 

'결사대의 아내'는 결사대로 '한목숨'을 바친 남편의 편지를 받고 눈물짓는 아내의 노래다. 그런데 그가 추모하는 남편의 사랑은 별 같고 해 같은 '나라님께 바친 사랑'이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지만, 그 울음은 '감개무량'한 울음일 뿐이다.
   
박시춘은 공연 활동으로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 주최, 국민총력 조선광산연맹 후원의, 조선연예문화협회가 조직한 산업 전사 격려 위문 예능대에 참여하여 아코디언과 기악을 맡았다.

위문예능대는 강원도 영월탄광부터 함경북도,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일대의 42개 광산을 돌며 국민가요와 경음악 등을 공연했다. 이 순회공연의 목적은 주요 광물 비상 증산 강조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전국의 주요 공장과 광산에 파견되어 종사자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박시춘이 작곡한 군국가요 '혈서지원' 레코드

박시춘이 작곡한 군국가요 '혈서지원' 레코드 ⓒ EBS 화면 갈무리

 
1944년 6월에 영화 <헤이따이상(兵隊さん, 병정님)>의 내용을 악극으로 만든 '헤이따이상'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9월에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로 열린 <성난 아세아(怒りの亞細亞)>에서 작곡과 편곡을 담당했다. <성난 아세아>는 "미영격멸(美英擊滅)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연예사가 있은 이래 처음으로 연극인들의 역량을 총집결한 예능제(藝能祭)"였다.

해방 후 눈부신 활동, 그러나 부역 사실엔 침묵

해방 이후 박시춘은 악단을 조직하여 공연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이 조직되자 지휘를 맡았다. 음반 생산이 재개되자 1948년에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눈물의 오리정', 1949년 '낭랑 십팔 세', '신라의 달밤', '청춘 블루스', '럭키 서울',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 만리', '애수의 네온가', 1950년 '애정산맥'과 같은 인기곡을 다수 발표했다.

특히 현인(玄仁)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꿀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전쟁 때는 '전우야 잘 자라', '승리의 용사'(1950) 등과 같은 이른바 '진중(陣中) 가요'를 작곡하는 한편, 군예대(軍藝隊)를 이끌고 위문 공연에도 참여했다. 

이후 박시춘이 음악은 가히 우리 대중음악사의 목록에서 뺄 수 없을 만큼 성공한 작품들로 이어졌다. '님 계신 전선'(1951), '전선야곡'(1952), '굳세어라 금순아'(1953), '삼다도 소식',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 '청춘 고백'(1955), '남성 넘버원'(1958), '가는 봄 오는 봄'(1959) 등이 그것이다.

1960년대에도 '사랑의 메아리'(1963), '우중(雨中)의 여인'(1965), '돌지 않는 풍차'(1966), '일자상서'(1970) 등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하며 국내 대중음악을 이끌었다.

박시춘은 레코드사를 설립하여 운영했고, 영화음악에 참여하였으며, 영화사를 설립해 영화 제작에 나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삼등호텔', '딸 칠형제'(1958), '가는 봄 오는 봄', '육체의 길'(1959), '장미의 곡'(1960)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그는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1982년에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해방 이후 그가 대중음악계를 이끈 공로로 주어진 서훈이었다. 그는 1996년 6월 30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제 강점기에 대중음악은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에게 민족의 아픔과 꿈을 어루만지는 위안의 노래였다. 대중음악인들이 대중의 벗이면서 우상이 되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제의 나팔수 구실을 마다하지 않은 이도 적지 않았다. 

군국가요만으로 그 업적을 평가하지 말라?

이들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전시 총동원체제를 선동했다. 지원병이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자고 노래했다. '기본적으로 권력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대중문화의 속성'을 참작하더라도 이들 가운데 해방 후 일제 부역을 사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혈서지원'으로 '나라님 병정 되기'가 소원이라는 노래를 만든 박시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해방 조국으로부터 대중음악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서훈받았지만, 식민지 시기에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에 부역한 과오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런 박시춘의 전력을 고려하면 '3, 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송출된 방송에 그의 노래가 연주된 게 특집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나무랄 수 없다. 비록 해방 이후에 만든 노래이긴 하지만 '비 내리는 고모령' 이면에 그가 만든 대표적 군국가요 '혈서지원'이 어른대는 이상 말이다. 

'혈서지원'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자원입대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탈바꿈하여 '혈청 지원가'란 제목으로 국방부가 선정한 애창 군가에도 올랐다. 여전히 식민지 역사 청산이 미완인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무지가 부끄러워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시춘이 뛰어난 가요작품으로 대중들에게 사랑과 갈채를 받았고, 국내 대중음악을 이끈 것을 부인할 수 없듯 그가 군국가요로 일제에 부역한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떤 논자는 2천여 편 중 서른 편 정도의 군국가요만으로 <친일인명사전>이 그의 활동을 "친일을 향해 질주한 것처럼 평가"했다면서 그의 군국가요가 "작품 전체를 함축할 정도로 분량과 품질의 측면에서 과연 문제적이냐"고 반문한다. (이동순, 일제말 군국가요의 발표현황과 실태, 2011)

그리고 마침내 그는 "친일이라는 단순 논리로 그들을 비판하고 부정한다면 이는 문화파괴의 또 다른 악순환을 낳는 결과"라는 해괴한 결론에 이른다. "결과론만 내세우는 직선적 사고의 위험성"과 "너그러운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이 익숙한 논지가 결국은 해방 70년이 넘도록 식민지 역사 청산을 미루게 한 원인임을 씁쓸하게 확인할 수밖에 없다. 
박시춘 혈서지원 비 내리는 고모령 불후의 명곡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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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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