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05 08:33최종 업데이트 19.03.05 08:33
"헤이, 초빼이!"

매일 술을 마시는 친구를 향해 나는 함부로 이렇게 부른다. '초빼이'는 경상남도에서 술주정뱅이나 술꾼을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 본디말은 초병(醋甁)이다. 초병을 경상도식으로 불러 '초빼이'가 된 것이다. '초빼이'는 처음 들으면 욕설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술을 좋아한다고 자부하고, '초빼이' 뜻을 이해하면 기꺼이 감당할 만한 별명이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술꾼을 초빼이라고 부른다. ⓒ 허시명

 
막걸리학교를 운영하다보니 내 주변에는 초빼이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하루에 술을 몇 병 마시냐고 묻지 않는다. 그의 기분에 따라 마시는 양이 달라질 테고, 술 양을 정해놓고 마시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어떤 '초빼이'는 매일 술을 마시기 위해서 운동이나 등산을 한다. 몸이 아프고 형편이 어렵고 가정이 불안하면, 규칙적으로 술 마시기 어렵다.

노련한 '초빼이들'의 특징 하나는 소주가 아니라 막걸리를 즐긴다는 점이다. 젊은 날에는 소주로 달렸더라도, 빠르게는 40대에 좀 늦게는 50대에 이르러 막걸리로 전향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것은 알코올 도수가 높으면서도 값이 저렴한 소주가 있기 때문이다. 막걸리만 마셔서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 어렵다. '초빼이들'은 푸념처럼 막걸리는 배가 불러서 많이 못 마신다고 말한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과 못 마시는 사람은 확연히 구별된다. 이는 알코올을 잘 분해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로 나뉜다. 술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반점이 생기고, 두통이 오고, 속이 매스꺼운 사람은 술 분해 유전자가 적거나 아예 없다. 이런 유형이 한국인의 30% 정도는 된다고 한다.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좋아하면 평생 고역이지만, 알코올을 잘 분해하는 사람이 술을 좋아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 넘친다.

술을 마시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술 센 사람의 경우는 좀 다른가보다. "술 마시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는 초빼이는 "저는 힘을 얻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라고 했다. 알코올 1g에는 7㎉의 에너지가 들어있고, 막걸리가 새참으로 쓰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다만 이때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주량 정도까지다.

신문사에 다니는 대학동기인 초빼이 친구가 있다. 그는 술을 좋아하면서 근무중 술을 마실 수 있는 드문 직장을 선택했으니 행운아다. 그는 말한다.

"막걸리는 내 생활의 에너지원이다. 3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데, 요즘도 꼭두새벽에 일어난다. 출근 시간이 점점 빨라져 2년 전부터는 새벽 5시에서 새벽 4시50분으로 10분 당겨졌다. 아침에 기자실 문을 맨 먼저 따고 들어가 조간신문 챙기고 복사하고 기사 발제한 뒤 오전 11시쯤 내 원고를 마감한다.

점심은 막걸리 시간이다. 아침 마감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지친 육신과 허기진 영혼을 달래줄 생명수인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면 환하게 정신이 맑아진다. 동료 선후배, 취재원들과 함께 들이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한다. 막걸리는 대화를 촉진하는 소통의 윤활유다. 독한 소주보다는, 밥을 따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는 막걸리가 대화에는 제격이다."


그에게 술 습관을 물었다.

"주로 평일 낮에 마신다. 술맛은 낮술이 최고다. 대화 상대가 있어야 막걸리 맛이 돈다. 많게는 한 번에 서너 병 마실 때도 있다. 오랜 만에 만난 언론사 선배이거나, 그날 마감하느라 정신이 반쯤 나간 날, 죽이 잘 맞는 동료와 한 잔 할 때, 또는 봄바람 불고 꽃잎이 떨어질 때가 그런 날이다. 막걸리는 분위기가 그날 주량을 좌우한다. 저녁 술은 가능한 한 피하고, 아침 저녁 끼니는 거르지 않는다. 다음날 새벽 기상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사 초빼이 친구에게 술 마시는 규칙만 있는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30년을 한결같이 10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함이 있었다. '술 마시면서 용케도 직장 생활을 유지하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규칙적으로 하루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다.

그에게 낮술 마시는 시간마저 없었다면, 그는 매일 오전 11시에 마감하는 원고를 지키지 못했을 테고, 틀에 짜인 삶을 견뎌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 술을 마시는 것을 그의 직장도 그의 부인도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술을 언제까지 마실 거냐고 물었더니, 비장하게 말한다.

"마실 때까지 마셔 봐야겠다. 막걸리를 오래 마시기 위해 2000년 1월 1일부터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영혼의 안식이 되는 술을 받아들여주는 고맙디 고마운 내 몸을 혹사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지나친 음주는 삼간다. 술을 즐기되 끊는 맛이 있어야 한다. 필요할 때 절제할 수 있어야 맛있는 술을 오래 즐길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막걸리를 마시는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게 삶의 목표 중 하나다."

그는 진정한 '초빼이'였다. 그렇다면 초병이 어떻게 술꾼의 별명인 '초빼이'가 되었을까?
 

목이 가늘고 몸통이 불룩해서 초두루미라고도 불리는 초단지. ⓒ 허시명

 
온돌방이 있던 시절엔 집집마다 초병이 하나씩 있었다. 초병이 놓인 자리는 부뚜막 위였다. 됫병들이 병이 초병으로 놓였거나, 몸통이 두루미처럼 불룩하고 목이 가늘어서 '초두루미'라고 부르는 초단지가 놓여 있었다. 초병들이 부뚜막을 탐한 것은 따뜻한 온기가 있어야 초가 잘 되기 때문이다. 초병은 배가 불룩한데 술꾼 초빼이의 배를 닮았다.

부뚜막 위의 초병은 늘 술을 갈망한다. 초병에서 초를 따라 쓰고 나면, 술을 부어주어야 한다. 이때 술은 초산균의 먹이가 되어 초로 변한다. 만약 술을 따라주지 않아서 먹이가 부족하면 초산균은 초산을 먹어버려, 식초가 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살균하지 않은 식초의 맛을 유지하려면 일정량의 술을 계속하여 부어줘야 한다. 부어주는대로 술을 소화시켜버리는 초병은 술꾼 초빼이를 닮았다.
 

초병 안에 생긴 그물눈처럼 생긴 초막 ⓒ 허시명

 

초단지 위에 놓인 동전에 초록 녹이 쓸었다. ⓒ 허시명

 
사람 몸에 술이 들어가면, 알코올은 아세트알데히드로 분해된다. 아세트알데히드는 숙취 성분이라, 이를 빨리 분해해야 한다. 아세트알데히드는 몸 안에서 아세트산으로 분해되고, 아세트산은 이산화탄소와 물로 분해되어 소화된다. 이때 몸 안에서 생성된 아세트산이 곧 식초이다. 술꾼들의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이 식초 성분 때문이다. 술꾼 초빼이는 신 냄새를 풍기는 초병을 닮았다.

초병과 술꾼 초빼이는 소주를 좋아하지 않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것도 닮았다.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초산균들이 편하게 소화시킬 수 있고,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같은 영양분도 들어있어 식초 만들기에 좋다. 소주 식초는 이름을 얻지 못했지만, 막걸리 식초가 이름을 얻은 것은 그 때문이다.

평생 술을 즐기기 위해서 오늘도 운동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는 초빼이들을 위해 술잔을 든다.

"브라보, 초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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