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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끼리 때리게 한 성심재활원 재활교사 
ⓒ KBS

"야. 이번엔 니가 얘 때려봐! 어서!"
"뭘 기다려! 때려! 더 세게!"


이 기막힌 상황이 세상에 알려진 건 2월 21일이다. 경기도 오산시에 있는 성심재활원. 장애인 거주 시설인 이곳에서 재활교사가 지적장애인들에게 서로 폭행을 하게 시켰다. 이유는 단순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다. 재활교사의 스트레스 해소용 심심풀이 땅콩은 자신이 돌보는 지적장애인들이었다.

폭행을 사주한 이는 입건되었고, 정부는 시설 전수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많이 봐 왔던 그림이다. '장애인에 대한 폭행사태가 발생하고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다. 한바탕 난리가 나면 정부가 나서 전수조사를 벌이고 가해자는 처벌을 받는다.' 늘 반복되는 패턴이다.

왜 그래야 할까?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도 서툰 발달장애인은 왜 계속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야 할까?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예방할 수는 없는 걸까?

11살 지적장애아들이 있는 나는 "역시, 내가 오래 살아야 해. 나 없으면 아들도 이렇게 맞아가며 남은 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할 수도 있어"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홍삼 진액을 타 마셔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한숨이 나온다.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80살, 100살? 120살? 때가 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데, 아들이 옆에 있는 한 죽음에 맞서 언제까지 생을 붙잡아야 한다니. 이건 억울하다. 억울해도 매우 억울하다. 죽음이라는 쉼마저 제대로 쉬지 못하게 박탈 당하는 느낌이다.

안 되겠다. 지금부터라도 마음 놓고 죽을 권리를 찾아야겠다.

"때가 되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달라!"

장애인은 그냥 '사람'이다

이 권리를 찾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전 국민의 장애인식 전환이다. 첫 시작부터 난관이 예상된다. 전 국민의 장애인식 전환이라니? 가능한 일일까 싶다. 하지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이다. 달걀을 머리에 이고 바위에 돌진이라도 해봐야겠다.

하나씩 짚어가자. 전 국민의 장애인식이 대체 어떠하기에 나는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전 국민의 장애인식은 딱 10년 전, 그러니까 아들이 태어나기 전 내가 가졌던 장애인식이다.

장애인은 불쌍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이고, 기회가 온다면 기부든 봉사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눠 기꺼이 돕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불쌍하고 도와주고 싶은 대상이지만 내 삶에 장애인이 엮이는 건 싫다. 그냥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측은지심으로 무장한 선한 마음으로 돕고만 싶다. 돕고 나면 뿌듯하기도 하다. "나 오늘 착한 일 한 것 같아"라는 보람도 느낀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 장애인은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물론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땐 도와야 한다. 그런데 그냥 도우면 안 된다.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을 때'만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도우려 하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본다. 우리는 길을 가며 스치는 많은 사람을 그냥 도와주려 하는가? 그렇지 않다. 도움을 요청해 오지 않는 한 돕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 대 사람 간 관계에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그에 따라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은 이런 관계의 규칙을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장애인을 사람이기에 앞서 장애인으로 먼저 바라본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와 규칙은 무시되고 '장애'만 부각한다. 장애인은 사람이 아닌 장애 그 자체가 되어 버리니 무조건 동정하거나, 무조건 거부감을 느끼는 대상이 된다. 이럴 때 우리의 장애인식은 '장애인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장애 그 자체'이다. 선의로 차 있는 동정심조차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고 장애로만 바라보니 성심재활원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도 반복해서 일어난다.

학교에서, 센터에서, 거주 시설에서 장애인은 사람이 아닌 그냥 '장애 그 자체'다. 사람이 아니니 나와 똑같은 감정을 지니고, 똑같은 삶을 살아가며, 나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불쌍하거나 싫은 대상. 우리는 장애인을 '장애'라는 프레임에 가둬 버린다. 

전 국민의 장애인식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장애인은 사람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장애가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사람인데 콧구멍이 크고, 누군가는 사람인데 소심한 성격을 지녔듯, 장애인도 사람인데 그냥 장애가 더불어 있을 뿐이다. 

장애인을 장애 그 자체가 아닌, 사람으로 보게 되면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 우리가 길 가는 타인을 함부로 동정하거나 함부로 돕지 않듯 장애인에게도 그러지 않게 된다. 우리가 길 가는 타인을 무조건 혐오하거나 피하지 않듯 장애인에게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무인도에 가지 않는 한 혼자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장애인이 장애가 아닌 사람이 되면, 우리가 일상에서 여러 관계를 맺으며 삶을 살아나갈 때 장애인도 그 관계들 속에 당연한 일부분이 된다. 돕고는 싶으나 내 삶에 엮이지는 말았으면 하는 존재가 아닌 내가 살아가면서 관계 맺는 세상의 당연한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전환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이 글을 읽었다고 해서 "아! 그렇겠구나"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당연한 인식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때가 되면 나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놔두고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 왜냐면 아들은 장애인이 아닌 단지 장애가 있을 뿐인 사람이니까. 우리 아들도 사람으로서 존중받으며 살아나갈 수 있을 테니까.

예산, 언제나 이게 문제다
 
제도적인 발전은 한 마디로 '장애인 복지의 확충'을 뜻한다. 복지의 확충에는 예산이 들어간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다.
 제도적인 발전은 한 마디로 "장애인 복지의 확충"을 뜻한다. 복지의 확충에는 예산이 들어간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다.
ⓒ unsplash
   
전 국민의 장애인식전환과 동시에 제도적인 발전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과제도 어려웠는데 두 번째 과제는 더 어려워 보인다.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멀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그래도 어쩌랴. 가야 하는 길이니 나는 간다.

제도적인 발전은 한 마디로 '장애인 복지의 확충'을 뜻한다. 복지의 확충에는 예산이 들어간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다. OECD 가입국들의 5분의 1에서 10분의 1 수준이다. 예산, 언제나 늘 예산이 문제다. 예산이 담보되지 않는 복지는 허구다. 이럴 때면 4대강의 자연을 파괴하기 위해 전 정권에서 날려버린 예산들이 너무나 아깝다. 

예산의 담보가 왜 중요한지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가정해서 들어보자. 어느 기업에서 휠체어에 탄 지체장애인 열 명을 웹디자이너로 고용했다. 그 기업은 "우리 회사는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 앞장서겠다"며 대외홍보를 통해 '착한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고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출근 첫날, 장애인들이 모두 결근을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장애인의 일자리는 만들었는데, 이들의 휠체어가 회사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휠체어 경사로를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로 진입하기 위한 수십 개의 계단을 쳐다보며 휠체어만 동동 구르고 있는 지체장애인을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때 회사가 '공사할 예산이 없어서 공사하지 못했다'고 변명한다면, 이 회사는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선 좋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번엔 가정이 아닌 현실을 보자. 몇 년 전 발달장애인법이 만들어졌다. 법대로 실현만 된다면 발달장애인 삶의 질은 조금이라도 더 좋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법이 만들어지기 전이나 후나 변한 게 없다.

당시 이 법이 만들어질 땐 3000억 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이 법을 시행하기 위해 쓰인 예산은 300억 원대다. 필요예산의 10분의 1수준만 투입이 된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정책이 시행된다고 선전은 하는데 내실을 들여다보면 대상자 수도 적고, 복지의 내용은 허술하기만 하다. 예산이 담보되지 않은 정책을 가지고도 우리는 제도적으로 발전을 이뤘다며 손뼉을 쳐야만 할까?

아니다. 그래서는 내가 마음 놓고 죽을 수가 없다.

장애가 없는 내가 그동안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당연하게 누려온 소소한 일상을 장애가 있는 아들도 당연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 복지정책이 촘촘하게 짜여야 하며, 그 정책을 현실화하기 위한 예산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래야 장애가 있는 내 아들도 마을 안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거창한 무엇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마을 안에서 한 명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듯, 장애가 있는 내 아들도 마을 안에서 여러 제도적 지원을 통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구축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저승사자와 '맞짱'뜨지 않도록

제도적 발전이 이뤄지지 않으면 내가 죽고 난 후 내 아들은 살던 집에서 계속 살지 못하고 성심재활원 같은 시설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시설입소가 금지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지방 시설에서 장애인 입소를 허락하고 있다. 좋은 시설도 많겠지만 혹여나 성심재활원 같은 곳에 가면 내 아들도 장애인을 사람이 아닌, 장애 그 자체로 보는 이들에 의해 폭력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들의 남은 생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둘 수 없으니 나는 마음 놓고 죽지도 못한다. 저승사자가 와도 맞짱 떠서 나중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내야 할 판이다. 

투쟁에 나선 나의 구호는 하나다.

"나에게 마음 놓고 죽을 권리를 달라!"

나도 남들처럼 온전히 제 수명을 누리다 편하게 눈을 감고 싶다. 자식이 장애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그래야 한다. 편안한 죽음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리다. 그 권리를 찾고 싶다.

태그:#성심재활원, #장애인폭행, #발달장애, #장애인, #류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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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기자, 현직 작가. 저서로는 [배려의 말들]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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