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한 때지 뭐…" 깊이 빠져있는 취미나 관심거리에 대해 물어보면 많이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이다.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관심이 없거나 적어졌다는 뜻이다. 어찌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영원한 것은 없다. 하물며 그것이 취미나 관심거리는 수시로 바뀌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나이에 따라 수시로 달라진다.

더불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이들이라면 빠지지 않는 대사도 있다.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맞다. 생활에 허덕이다 보면 예전에 여유 있게 즐기던 것들이 잘 들어오지 않게 된다. 나 역시도 그러하니까. 하지만 주변 지인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듯하다.

과거 좋아했던 것들에 대한 흥미는 떨어졌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새로운 흥밋거리나 관심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낚시, 등산, 각종 동호회 활동 그리고 힘든 현실을 한탄하면서 즐겨 마시는 한잔의 술까지. 정말 미치도록 생활고에 허덕이고 바쁘지 않는 이상 무엇인가는 다들 즐기거나 중독되어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봇, 프로레슬링, NBA 등 나이대 별로 바뀌던 관심사
 
나 역시 그렇다. 초등학교 때 나의 일상을 사로잡은 것은 거대 로봇이었다.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당 혹은 우주에서 온 침략자들로부터 우리가 사는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용사. 그들과 함께하는 로봇 영웅은 나의 머릿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줬다.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방영 해주는 만화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관심도 없는 주산학원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던 것도 주말에 한번씩 틀어주는 비디오를 보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돈이 생기는 대로 조립식 완구를 사서 맞춘 후 신주단지처럼 책상에 보관했고, 도화지를 펼쳐놓고 로봇들을 그리기도 했다. 듀크프리드라는 외계인 왕자가 몰던 그렌다이저의 필살무기 더블 하켄, 악당로봇을 V자 형태로 갈라버리던 볼트 파이브의 장검, 먼 미래사회의 평화를 지키던 Z건담, 건담마크1, ZZ건담 등 다양한 건담시리즈까지,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로봇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 WWF에 미쳐있었다. 당시는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지금의 종합 격투기처럼 고정적으로 자주 보기는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잘살던 친구집에서는 안테나를 달아 외국 방송을 통해 WWF를 시청했지만 나로서는 먼 세계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WWF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스포츠 신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각종 잡지의 별책부록을 모으는가 하면 비디오 대여점에서 지난 경기의 녹화 영상을 빌려서 레슬러들의 액션을 접했다. 전자오락실에서 게임기를 통해 즐기는 간접 체험도 쏠쏠했다.

그래서 일까.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동생들과 프로레슬링 얘기를 나누다보면 세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좋아했던 프로레슬러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동생들이 얘기하는 프로레슬링 스타는 WWE를 이끌었던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 드웨인 '더 락' 존슨, 브록 레스너, 'CM펑크' 필 브룩스 등이다.

나도 어느 정도는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열광했던 프로레슬러들은 헐크 호건, 얼티밋 워리어, 마초킹, 빅보스맨, 달러맨 테드 디비아제 등이다. 더 락, 레스너 등이 스타로 활약할 때는 난 이미 프로레슬링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졌던 때인지라 사실 그들에 대한 감흥은 없다. 여전히 나의 추억 속에서는 호건과 워리어 등이 최고다.

NBA(미 프로농구) 같은 경우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열광하는 정도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다. 스테판 커리가 이끄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때문에 다시금 NBA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한때 10년 이상을 안보는 등 꺾여도 크게 꺾였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골든스테이트가 관련된 경기가 아니면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당시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에 열광했으며 시간이 지나서는 존 스탁턴-칼 말론 콤비나 4대 센터(패트릭 유잉,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찰스 바클리 등 다양한 스타들에게 빠져들게 됐다. 특히 한때 '제2의 조던'으로 불렸다가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앤퍼니 하더웨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다.

이렇듯 취미나 관심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흥미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다른 쪽으로 바뀌는 경우가 잦다. 특히 내가 해당 분야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스타가 사라질 경우 언제 그랬냐는 듯 열정이 식어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외라는 것도 있다. 나에게는 중국 무협 작가 '신필' 김용과 그의 작품들이 그렇다.
 
김용의 무협 판타지, 그의 세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15편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김용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 작품 활동을 중단했으며 현재는 고인이 된 상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만들어낸 무협 판타지 속에서 한번도 빠져나간 적이 없다. 김용이라는 작가를 만나지도 못했으며 이제는 세상에 없는 분이지만 난 꾸준하게 김용의 무협 세계 속에 거주(?) 중이다.

입문은 여전히 프로레슬링의 매력에 빠져 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우연히 영웅문 3부작을 읽게 되었고 불과 며칠 만에 방대한 김용표 무협판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1부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2부 <신조협려(神雕俠侶)>, 3부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는 연결성은 있으나 각각의 다른 작품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내가 읽었던 책에서는 이를 영웅문 시리즈로 묶어서 출간했다.

각 시리즈가 삼국지 전집 뺨치게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모두 다 읽는데 불과 한달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읽는 것은 물론 수업시간에 몰래 교과서 사이에 끼워 넣고 읽는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비호외전(飛狐外傳)>, <천룡팔부(天龍八部)>, <소오강호(笑傲江湖)>, <녹정기(鹿鼎記)> 등 김용의 다른 작품들도 모조리 읽게 됐다. 하나같이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읽을 김용 작품이 없어서 서운해하고 있던 중 동사, 서독, 남제, 북개 등 영웅문 캐릭터들이 따로 소설로 나온 것을 보고 반색을 하면서 구입했다가 김용의 작품이 아닌 다른작가들이 원작을 바탕으로 가공했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의 나는 김용 작품에 크게 매료되어있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특정작가에게 그 정도로 빠지는 경우는 없을 것 같다.

김용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역사를 배경으로 실제인물과 가상의 캐릭터들이 혼용되어 스토리를 만들어나간다는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무협소설에 비해 좀 더 현실감 있고 무게감도 더 느껴졌다. 공중을 날아다니며 장풍을 난사하고 손짓 한 번에 몇십 명을 해치우는 다른 작품과 많이 달랐다. 실제로 100% 주관식으로 치러진 고등학교 중간고사 세계사 시험에서 단 한 문제만 틀리고 모두 맞추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공부는 전혀 안하고 김용 작품만 읽었을 뿐인데 세계사 선생님까지 깜짝 놀라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러니 당시 김용소설에 안 빠질 수가 없었다.

김용표 무협소설의 나비 효과는 계속 이어졌다. 군 제대 후 직접 무협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하고 취업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 옆에서 팔목 아프게 볼펜을 끄적거리며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초창기에 타자를 칠 줄 몰랐던지라 친구들이 대신 쳐주기도 했다. 물론 무협소설을 꼭 쓰고 싶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금세 타자에 익숙해졌고 현재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편의 무협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작품 속에서 김용의 색깔이 조금씩 묻어나기도 했다. 당시 알고 지내던 대다수 무협, 판타지 작가들은 기존에 유행하던 한국식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액션신이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김용식의 디테일한 동작 설정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난데없이 하늘을 날고 바위를 부수는 것보다 상대의 공격을 막고 차고 던지고 꺾고 심지어 물어뜯고 뒹굴어 다니는 등 최대한 머릿속에서 액션이 그려지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어찌보면 바로 이런 성향이 격투기라는 종목을 좋아하게 되고, <오마이뉴스>에서 기사까지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싶다.

나는 현재 인쇄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소설책을 내는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무성의한 태도에 화가 났고,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느냐. 직접 한번 해보시든가"라는 말에 진짜로 직접 덤볐고 이제는 천직이 됐다. 정식으로 디자인관련 학교나 교육기관을 다닌 것은 아니고 신문사 편집기자 옆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기술의 전부다.

당시 나는 기능보다 이해 위주로 디자인 기술에 접근했다. 하나씩 기능을 알아가다가는 언제 마스터할지 기약이 없었다. 글을 쓸 때처럼 그 원리와 배경을 머릿속에서 벽돌처럼 한 장씩 쌓아나가며 이해했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깨닫는 것이 많았다. 이후의 기능적인 부분은 일을 하면서 알아나갔다. 나의 스타일일 뿐이지만 배우는 속도는 아주 빨랐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글 쓰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뭔가를 배우면 더 좋지않나 싶다.

어쨌든 10대에 '김용의 세계'에 입문한 나는 40대인 지금도 여전히 그 속에서 함께 생활 중이다. '눈팅족'이지만 '김용 매니아 카페'에서도 오랫동안 활동 중이고 책장에도 김용 관련 서적이 빽빽이 꽂혀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그는 영원한 내 마음 속 영웅이다. 아마도 나는 노인이 되어서도 그 세계에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