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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프 창간 30주년 기념 첫 출판 도서
▲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  이프 창간 30주년 기념 첫 출판 도서
ⓒ 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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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2000년대 초반에 대학교를 다녔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고, '이프'라는 잡지를 알게 되고, 월경페스티벌에 참석해 본 적도 있지만 늘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외면하자니 '여성'으로서 나의 삶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전해져오는 위로가 반가웠고, 깊게 관여하기는 두려웠다.

이 사회의 절반을 이루는 남성들을 적으로 놓고 싸우는 무시무시한 포지션에 나를 놓는 것 같아 적당히 발만 걸쳐두고 거리를 뒀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프'는 폐간되었고 나 또한 페미니즘 같은 것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겐 2000년대에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을 하고, 군가산점제 폐지운동을 끌어냈던 '센 언니'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이프 창간호
  이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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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여성의 삶

2015년에 '메갈리아'가 탄생하고,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센 언니'들이 다시 나타났다. 2010년대의 20대들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해 '여성들의 언어'로 여성혐오와 맞짱을 뜨기 시작했다. 소심한 20대였던 나와 다른 그들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사태를 들여다보는 관망자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이번엔 먹고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럼에도 나는 결국 비혼주의자가 되었고, 에코페미니스트로 나를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비출산을 결심했단 이유로 시어머니가 될 뻔(?)했던 분에게 "제 정신이 아닌 여자"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이별을 종용 당했다. 한 면접에서는 인생의 여자 선배를 자처하던 이로부터 "지금 나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취업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조언도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페미니즘은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도망가려고 해도 피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은 이프 창간 20주년을 맞이해 출간한 첫 번째 책이다. 페미니스트 1세대부터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고백'을 담았다. 1997년~2017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20대부터 60대에 걸친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담아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지형도를 그려낸" 작업이자,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계보학인 셈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한 오해

최나로와 국지혜는 메갈리안과 워마드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편향된 시선을 지적한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거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다. 나 또한 그랬다.

최나로는 사람들이 메갈리안에 대해 "20대 여자, 살만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딸, 남자들을 미워하는, 까칠한 프로불편러, 그리고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일베 말투를 쓰는 젊은 여자들"이라는 점이 지나치게 집중되었음을 지적한다.(28) 미러링 이상의 혐오 표현이 존재하기도 했고, 분명히 그 안에서 도덕성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지점이 있었음을 저자들 역시 인정하고 있다.

워마드의 경우 실명으로 활동하는 페이스북보다 자유로운 논쟁들이 가능한 공간이다. 스스로 신상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규칙을 만들어 "발화권력이 집중되는 것"(80)을 막는다. 페이스북은 팔로워들이 많은 유명인사들이 발화권력을 가진다. 워마드 안에서는 '여성이라면' 자유롭게 대화하고 연대할 수 있다.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은 워마드를 일베와 같이 취급하며 골치 아픈 문제적 집단으로 인식하기 전에 그동안 아무도 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는, 워마드라는 웹사이트 이름 뒤에 숨은 수많은 여성들의 진짜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워마드가 익명으로 싸우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고 있고 그만큼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만큼 여성들이 절실하고 절박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85)

일베와 전면전을 벌이면서도, 과격하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계열에서도 배격 당했던 워마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독 페미니즘은 온건해지기를 강요받는다. 어떤 소수자 운동이든 스펙트럼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온건함'의 요구는 결국 기존의 체제에 가장 친화적이고 융화될 수 있는 목소리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과격하고 절실해 보이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변화'의 폭은 조금 더 넓어질 수 있다. 그들의 존재 의의이다.

자신을 긍정해줄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선배 페미니스트들이 '이프' 안에 모여 지지받고 연대하며 목소리를 모으고,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듯이 최근의 젊은 여성들에게도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들은 자존감이 낮고 자기혐오에 빠진 채 자라왔을 가능성이 높다.

홍승은은 "수용적인 지지공동체"안에서 "자기의 서사를 구성하고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는 가운데 "우리의 언어"를 만들 수 있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93) 미투 운동과 탈코르셋 선언에 대해 더 많은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의식이 있는 여자들'이라는 혐의를 벗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고, 도덕적인 완결함까지도 요구받는 이들은 이미 많은 고통을 받았고 용기를 냈음에도 더 많은 적대적인 시선들과 싸워야 한다.

힘들게 용기를 낸 여성들에 대해 '과거에 지난 일을 왜 한참 지낸 이제 와서 고백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난 지금에 와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고민에 대한 이해는 싹 제거된 채 그들의 '진의'를 묻는다.

우리는 용기를 낸 이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 더 울려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단단한 확성기가 되어주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남성들과 싸우기 위한 집단이 아니다. 여성혐오와 가부장제라는 뿌리 깊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와 싸우려는 것이며, 너무 작아 들리지 않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보자는 움직임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30년은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앞으로 더 많이 퍼져나갈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 - 1997 - 2017

김서영 외 지음, 이프북스(IFBOOKS)(2017)


태그:#대한민국페미니스트의고백, #이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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