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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어느 날, 친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너 그거 봤어?"

화제의 대상은 이름하여 '○○ 테이프.' 그때는 그게 무슨 일인지도,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른 채 흘러 보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습니다. '몰카'라는 말로 단순화하기엔 너무 심각해져 버린 디지털 성범죄 때문입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동안 일어난 불법촬영 범죄(성폭력특례법상 카메라 등 이용촬영)는 6465건입니다. 전체 범죄 발생건수(166만 2341건)의 0.39%이니 누군가에게는 적은 숫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범죄 발생건수는 매년 큰 차이가 없는 데에 비해 불법촬영 범죄는 2011년 1535건, 2012년 2412건, 2013년 4841건으로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불법촬영물은 너무 쉽게 온라인에서 확산되는 중입니다. 이 영상과 사진이 퍼지면서 피해를 입은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며, 그들의 삶은 산산조각 납니다. 수백만 원을 들여 디지털 장의업체에 의뢰해도, 최초 유포자를 붙잡아도 어딘가에 자신의 사진과 영상이 올라왔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택하는 이들까지 나옵니다. '디지털 장의사' 1호 김호진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는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삭제 의뢰를 했다 며칠 사이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 부모는 자기 딸이 왜 죽었는지 이유조차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고도 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6월 디지털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최근 그 일환으로 방송통신위원회는 음란물 유통 사이트 등 해외 불법사이트 895곳의 접속을 원천봉쇄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검열' 논란이 불붙었습니다. 정부가 보안접속이나 우회접속을 막기 위해 SNI 기술을 이용했기 때문이죠.

정혁 시민기자는 이 방식이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를 즉각 확인해 아예 집 앞에서부터 막아선다고 비유했습니다. 이때 목적지를 확인하고 차단하기 위해, 암호화되지 않은 정보를 엿보는 일은 곧 감청이며 검열이라고 비판합니다. 기술상 한계도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정부는 "감청과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게다가 이처럼 보안 허점을 이용한 차단 방식은, 인터넷 보안을 증진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행위란 게 너무나 명백하다. 어차피 새로운 보안기술이 적용되면 무용지물이다.

☞ [기사 읽기] 나쁘니까 막는다?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http://omn.kr/1hcdh

여성계도 알고 있습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서 활동하는 한누리 시민기자는 "차단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에 동의한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무도 사이버성폭력을 저지르지 않고 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대개 시행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시민기자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근본적 조치든 임시적 조치든, 사이트 차단은 피해 경험자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조치다. 내가 적을 두고 사는 나라가 적어도 자국 IP로는 내 동의 없이 유포된 성폭력 촬영물을 볼 수 없도록 막는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모른다. 그 정도 조치라도 생겼다는 게 당사자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당신은 모른다.

☞ [기사 읽기] 억압 행사하는 건 정부 아니라 '불법 동영상' 소비자들 http://omn.kr/1hd5y

이번 논란의 결말은 어디로 향할까요. 방통위는 일단 적극 해명에 나섰습니다. ▲ 기술적으로 도·감청은 불가능하며 ▲ 불법촬영물 등을 유통하는 해외 사이트가 https로 운영돼 피해 구제에 한계가 있어 SNI 차단 방식을 도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명백합니다. 다만 그 잘못을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를 두고 한국 사회는 지금 뜨거운 토론 중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최대한 빨리, 정확한 답을 위한 일이겠지요. 누군가의 인생이 처참해지는 것을 개인의 잘못으로 떠넘기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좋은 길을 찾는 것이 부디 이번 논란의 '해피엔딩'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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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에디터의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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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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