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국제레슬링연맹(FIL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경량급의 레전드' 심권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48kg급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그랜드슬램(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심권호는 올림픽이 끝난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국제레슬링연맹의 체급 조정으로 인해 -48kg급이 퇴출되고 -54kg급이 신설된 것이다.

유도, 레슬링, 복싱처럼 무게로 체급을 나누는 투기 종목에서 체급에 따른 핸디캡은 상당히 크다. 실제로 -48kg급이 폐지된 후 이 체급에서 활동하던 경량급 선수 대부분이 현역 은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심권호는 불굴의 의지로 체급 상향을 선택했고 1998년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1999년 아시아선수권,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제패하며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최근 UFC에서도 체급을 넘나들며 두 체급 석권에 도전하는 선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체급 변경은 여전히 선수들에게 큰 부담이다. 특히 최근 UFC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는 플라이급이 폐지될 거라는 루머가 돌고 있어 플라이급 선수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저격수'를 자처하며 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하는 밴텀급 챔피언 T.J.딜라쇼와 플라이급 사수에 나선 헨리 세후도가 벌이는 UFN 143 대회가 격투팬들에게 더욱 주목 받는 이유다.

플라이급을 없애기 위해 UFC에서 고용된 저격수 딜라쇼

2011년 UFC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 TUF 14번째 시즌을 통해 UFC에 데뷔할 때만 해도 딜라쇼는 크게 주목 받는 파이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딜라쇼는 169cm의 작은 신장에도 밴텀급에 잔류해 뛰어난 스피드와 변칙적인 타격, 준수한 레슬링 실력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승리를 쌓아 나갔다. 그리고 딜라쇼는 2014년 5월 종합격투기 32연승을 달리며 '경량급의 표도르'라 불리던 헤난 바라오를 5라운드 KO로 꺾고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딜라쇼는 조 소토를 5라운드 KO, 다시 만난 바라오를 4라운드 KO로 제압하며 밴텀급의 새로운 제왕으로 군림하는 듯 했다. 하지만 2016년 1월 전 챔피언 도미닉 크루즈와의 3차 방어전에서 1-2 판정으로 패하며 타이틀을 빼앗겼다. 사실 딜라쇼가 승자가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접전이었지만 심판들은 4년 3개월 만에 타이틀전을 치른 전 챔피언 크루즈의 손을 들어 줬다.

많은 격투팬들이 타이틀을 잃은 딜라쇼가 플라이급으로 내려갈 거라 예상했지만 딜라쇼는 밴텀급에서의 경쟁을 이어 나갔다. 딜라쇼는 UFC200에서 하파엘 아순사오를 판정으로 꺾으며 3년 만에 설욕에 성공했고 가브란트가 크루즈를 꺾고 새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했던 UFC 207에서는 존 리네커를 판정으로 제압했다. 벨트를 빼앗긴 후에도 여전히 밴텀급 최정상급 선수임을 증명한 딜라쇼는 다시 타이틀 도전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2017년11월 크루즈를 꺾고 새 챔피언에 오른 코디 가브란트에게 도전한 딜라쇼는 열세라는 예상을 깨고 가브란트를 2라운드 KO로 제압하고 벨트를 탈환했다. 딜라쇼와 가브란트는 5개월 후 재대결을 펼쳤지만 딜라쇼는 가브란트를 1라운드 KO로 꺾으며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드미트리우스 존슨의 집권 시절부터 플라이급 챔피언과의 슈퍼파이트를 원했던 딜라쇼는 드디어 오는 20일(이하 한국시각) 세후도와 플라이급 타이틀전을 치르게 됐다.

딜라쇼는 "UFC가 플라이급을 없애라면서 날 고용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세후도를 꺾고 밴텀급과 플라이급을 통합해 버리겠다고 자신하고 있다. 물론 10년 가까이 -61.2kg급에서만 싸웠던 딜라쇼에게 -56.7kg급으로의 감량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딜라쇼는 판정까지 가지 않고 2체급 챔피언에 오를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언제나 이변을 만들어 왔던 딜라쇼는 이번에도 감량의 부담을 견뎌내고 플라이급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을까.

UFC 플라이급 사수의 임무를 띤 올림픽 금메달 출신 챔피언

딜라쇼가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챔피언까지 등극한 자수성가형 파이터라면 세후도는 그야말로 엘리트코스를 걸어오며 챔피언에 등극한 '천재형 파이터'다. 세후도는 미국 대학레슬링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기만 해도 '특급 레슬러' 대우를 해주는 UFC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5kg급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던, 그야말로 격이 다른 최고의 레슬러 출신이다. 

타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도 종합 격투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여느 파이터들과 달리 세후도는 종합 격투기 데뷔 후에도 파죽의 10연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세후도는 2016년4월 챔피언 존슨에게 도전했지만 극강의 레슬링과 패기만 있던 세후도에게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챔피언 존슨은 너무 강한 상대였다. 결국 세후도는 존슨에게 1라운드 KO로 무너지며 격투기 데뷔 후 첫 패배를 당했다.

2016년 12월 플라이급의 또 다른 강자 조셉 비나비데즈와 접전 끝에 판정패하며 2연패를 당한 세후도는 2017년 윌슨 헤이즈와 서지오 페티스를 연파하며 다시 타이틀 도전권을 따냈다. 세후도는 존슨전 KO패 이후 설욕을 벼르고 있었던 반면에 존슨은 역대 최다 방어 신기록(11차)을 세운 후 상대적으로 동기부여가 떨어져 있었다. 결국 세후도는 접전 끝에 존슨을 2-1 판정으로 꺾고 플라이급 2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존슨이 챔피언이던 시절부터 끊이지 않았던 UFC의 플라이급 폐지설은 딜라쇼와 세후도의 '챔피언 vs. 챔피언' 빅매치가 성사된 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마추어 레슬러 시절부터 -55kg급에서 활약하며 플라이급에 남다른 애정이 있는 세후도로서는 자신이 챔피언으로 있는 플라이급이 폐지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달갑게 들릴 리 없다. 플라이급을 없애기 위해 고용된 '저격수'를 자처한 딜라쇼전이 세후도에게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세후도가 플라이급을 지키기 위해선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세후도 본인이 격투팬들을 열광시키는 대형 스타로 거듭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슬링 공방 일변도의 다소 지루한 경기 스타일을 바꿀 필요가 있다. 물론 딜라쇼는 UFC 데뷔 후 KO승이 한 차례에 불과한 세후도가 쉽게 피니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과연 세후도는 딜라쇼의 쿠테타를 진압하며 플라이급을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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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C UFN 143 플라이급 타이틀전 TJ 딜라쇼 헨리 세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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