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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읽고 나는 상처받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개발 독재'가 할퀸 도시 빈민들의 참상을 보여 주는 전범화(典範化)된 텍스트이다. 국어 교과서에 등재되었다는 것, 70년대 소설이 여전히 스테디셀러라는 명성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정전화에 크게 기여했을 터다.

하지만 다시 읽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도시 빈민'에 여성은 없었다. 이것은 남성들의 투쟁과 그 패배의 장송곡이었고, 그 희생양은 기괴하게도 어린 딸 '영희'였다. 난장이 아버지는 메시아처럼 죽었지만, 정작 무엇도 누구도 구원하지 못했다. 집을 구한 건 달나라로 무책임하게 떠난 아버지도 영희의 두 오빠들도 아니었다. 딱지(입주권)를 사들이는 사내에게 몸을 팔고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며 딱지를 훔쳐낸 건 영희였다.

영희가 딱지를 사들이는 사내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는 그 무참한 비극적 상황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몸을 팔았던 수많은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팔 것이 몸밖에 없는 극단의 상황은 그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매춘에 기대 먹고산 모두는 그녀들만큼 아프고 참담할 수 없다. 그들이 죽도록 미안하더라도 그녀들의 상처는 회복될 수 없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영희에게 그토록 부주의하게 일어나서도 처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 부주의함에 나는 깊게 상처받았다.

위로는 우연히 왔다. 위로란 준 사람은 준지도 모르는 뜻밖의 방식으로 찾아온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의 글쓴이 13명은 상한 심정을 나 대신 따져 주었다. 내 부족한 언어로 조목조목 반박할 수 없었던 부정의를 낱낱이 해석해 주었다. 나는 진정으로 위로받았다. 다시는 이렇게 쓰지 않겠다는 허약한 다짐보다(다짐의 가능성도 전무하지만), 이렇게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얼버무리는 관용보다 따끔한 지적이 더 유효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잘못은 몰랐다는 이유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종종 면피할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알게 해야 한다. 알게 하지 않으면 교정할 수 없다. 알고도 고치지 못한다면 모두 불행하고 사회는 폭력으로 위험해진다.
  
책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겉표지
 책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겉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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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이 여성의 안위만을 작정한 비평이냐 하면 전혀 아니다. 13편의 논고 모두 매우 도발적이고 도전적이고 무엇보다 창의적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여성이 배제된 유구한 역사를 성찰하는 도구로서의 페미니즘은 그 어떤 논리도 도그마화하지 않으며 나아간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만 진리를 얻는 수행자처럼, 저자들은 문학 속 가부장적 편견들과 그 가부장에 공모했던 모두를 소환해 고착화된 정형을 철저히 부순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은 단일한 언어로 규명되지 않는 문학성을 새로이 '탄생'시키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창조를 위한 파괴'를 감행한 기록이다. 13명의 여성 연구자들의 치열한 고민과 성찰 그리고 담대한 제언들은 문학뿐 아니라 여타 텍스트를 다시 읽어낼 수 있는 훌륭한 렌즈가 된다. '문학을 심문하는 문학'으로 스스로를 심문했을 글쓴이들의 고뇌와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함께 보낸다.

1부는 식민지부터 근대 초기 문학을, 2부는 1950-70년대 정전화된 텍스트가 가부장으로 은폐한 식민지적 남성성을, 3부는 1970년대 이후의 텍스트를 통해 민주주의 가면을 쓴 보수, 국가주의 좌파들의 옹색한 남성성을 해부한다.

1부
권보드래 [평민의 딸, 길 위에 서다]는 '평민'여자 주인공을 등장시켜 여성 서사를 직조한 신소설을 재평가한다. 아무개의 아내로만 호명되었던 여성작가 이선희, 지하련, 최정희, 장덕조를 재발견한 류진희의 [해방기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 선택]. 인민을 위한 혁명이라면서 정작 여성은 그 대열에서 소외시켰던 남성 지식인들과의 각축 속에서도 때로 좌절하고 타협하면서도, 네 여성작가는 끝까지 자신의 글을 가꾸고 지켰다.

['배운 여자'의 탄생과 존재 증명의 글쓰기]에서 장영은은 당대 여성 지식인이었던 강경애, 박화성, 주세죽을 흥미롭게 탐구했다. 이들 '배운 여성'들은 수필, 일기, 대담, 소설 등으로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며 페미니즘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그녀와 소녀들]은 젠더 민족주의에 근거한 위안부 관점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민족에 기대지 않은 커밍아웃이 가능했을까를 조명한다. 이혜경은 위안부들의 '탄생성(과거, 현재, 미래의 나와 절연하는)'으로서의 증언 욕구를 면밀히 살핀다.

2부
허윤은 손창섭의 <회색 눈사람>의 남성 주인공을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해체한 퀴어한 주체로 새롭게 호명한다. <무진기행>의 나르시시즘적 한계를 파헤친 강지윤. '문학소녀'라는 이중적 함의의 분절 속에서도 읽기와 쓰기를 놓지 않은 여성들을 고찰한 정미지. 루이제 린저의 방한을 둘러싼 남성 문학 연대가 감춘 '여성해방'이 어떻게 보편적 인간의 탐구로 탈바꿈했는지를 전혜린의 공적, 사적 발언들을 통해 찾아낸 김미정. 모두 첨예한 질문들로 구성되었다.

3부
이진경은 1970년대 이후 문학의 정전들의 보유자인 조세희, 조해일, 최인호, 황석영, 조선작을 해부했다. 이 중 최인호의 [겨울 여자][별들의 고향]은 생존으로서의 매춘을 지우고 호스테스라는 섹슈얼리티를 만들어내 여성 성의 상품화를 촉발시켰다고 보았다. 혁명의 시간을 함께 건넜음에도 삭제된 여성들의 증언을 여성 후일담으로 다룬 공지영과 김인숙을 분석하고, 정유정의 장편소설이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망론'으로 소비되는 현상, [82년 김지영]의 균질화된 여성문제를 지적한 오혜진은 줄기차게 지워지고 비하됐던 여성문학을 '여성성의 주체화' 시각으로 다시 길어 올렸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대한 위 짧은 설명으로는 13편 논고들의 심층을 가늠해낼 수 없다. 직접 그 깊이에 가닿아보길 권한다. 각 논고들은 '페미니즘'이라는 큰 화두 아래 상호 보완적이다. 그러다 문득 길항적인 순간과 마주치는데, 찾아낸 모순을 못 본 채 두지 않고 치밀한 논리로 해부의 칼날을 신중히 들이대는 저자들의 윤리가 빛난다. 이것이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페미니즘으로 우리는 한 편'이라는 적당히 편들기는 없다.

난무하는 페미니즘 논쟁 속에, "너의 주장이 대체 페미니즘이긴 한 거냐"는 시도 때도 없는 힐난에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은 이렇게 답한다. "단일한 페미니즘은 없다"고. 무엇보다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의 글쓴이들은 그들의 논고로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애초 정해진 '문학성'은 없었다고. 당연히 '남성들이 승인한 문학'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게시


태그:#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 #문학성 , #페미니즘문학, #오혜진 , #여성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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