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개봉한 <오션스8>는 출연하는 주연 배우를 모두 여성으로 캐스팅한 범죄 영화다. 지금까지 나온 <오션스 일레븐>(2001), <오션스12>(2004), <오션스13>(2007) 모두 남성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에 반해 <오션스8>은 여성이 활약하는 식의 젠더 스왑(gender swap, 성별 교체)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고스트 버스터즈> 역시 1984년 원작과 달리 2016년 리메이크 버전은 주연 배우들이 모두 여성이다.
  
 고스트버스터즈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이런 젠더 스왑 시도에 대해 일부 관객들은 "왜 굳이 주인공들을 여자로 바꿔야 하느냐"고 불평하기도 한다. 물론, 해당 배우들이 연기를 못 한다거나 혹은 스토리에 개연성이 없다거나 하는 경우라면 이에 관한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 여성 주연 영화라고 해서 비평의 영역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불평은 배우의 연기보단 '왜 여자인가'에 맞춰져 있다. 물론 아직 성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나라들이 많지만, 대다수 사회는 남녀차별을 희석시키고 없애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이런 흐름을 고려했을 때 '여성이 주요 배역을 맡으면 안 된다'는 말은 구시대적인 차별 의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젠더 스왑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비판은 궁색해진다. 결국에는 남성이 독차지하던 영역을 여성이 맡는 것이 그저 불만이라는 뜻이 되니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여성 캐릭터는 범죄영화에서도, 로맨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주연을 맡을 수 있다. 남성 캐릭터가 지금껏 쭉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최근 만들어졌던 <오션스8>이나 <고스트 버스터즈> 등 여성들이 주연을 영화는 '여성도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한다.  
 
 <오션스8> 스틸샷

영화 <오션스8>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이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더 이상 직업에 있어 '금남의 구역', '금녀의 구역'은 없다. 여성들도 본인의 적성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직업을 찾고, 일을 한다. 직업이나 삶의 경계에서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는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변화들이 내심 못마땅한 사람들은 '굳이 그 작품에 사회적 약자를 넣어야 하느냐'는 주장을 펼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이상한 지적이다. 우리는 '남성이 생각을 하다니 신기하네', '이성애자가 말을 하다니 놀랍군', '비장애인이 걸어 다닌다니' 같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여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 아니었던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최근 게임계에도 영화계처럼 '소수자 드러내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게임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출시한 게임 오버워치(Overwatch)는 이전부터 게임 내에서 일부 캐릭터에게 소수자 정체성을 부여해왔다.

'아나(Ana)'는 장애가 있는 여성 노인 캐릭터고, '트레이서(Tracer)'는 여성이며 성소수자다. 정크랫 등 다른 캐릭터들도 의수나 의족을 착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루시우나 둠피스트는 흑인이고, 송하나와 한조 등 동양인 캐릭터들도 여럿 등장한다.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속 캐릭터 중 '트레이서'의 모습. 제작사 측에 따르면 게임 속 트레이서가 여성 성소수자 설정의 캐릭터라고 알려졌다.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속 캐릭터 중 '트레이서'의 모습. 제작사 측에 따르면 게임 속 트레이서가 여성 성소수자 설정의 캐릭터라고 알려졌다. ⓒ 오버워치 유튜브 갈무리

 
최근에는 오버워치 시나리오 작가에 의해 '솔져76(Soldier:76)'이라는 캐릭터가 게이임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솔져 캐릭터 설정을 두고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엄청난 비판과 반박이 오가는 중이다.

비판 의견을 내는 이들은 주로 솔져가 게이라는 설정이 '너무 뜬금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재미 있는 점은, 이와 같은 의견이 더더욱 이런 '소수자 드러내기'의 필요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속 캐릭터 중 '솔져76'의 모습. 2019년 1월 초, 오버워치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 의해 '게이' 설정의 캐릭터라는 것이 밝혀졌다.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오버워치' 속 캐릭터 중 '솔져76'의 모습. 2019년 1월 초, 오버워치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 의해 '게이' 설정의 캐릭터라는 것이 밝혀졌다. ⓒ 오버워치 유튜브 갈무리

 
예를 들어 게임 오버워치 세계관 속에서 '솔져76'은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정의를 추구하는 남성적인 리더 콘셉트의 캐릭터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게이로 설정되는 것은 어색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과연 성소수자는 정의를 추구하는 고독하고 남성적인 리더가 될 수 없는 걸까? '소수자가 그런 이미지를 가질 리 없다'는 주장은 소수자의 존재를 더 드러내는 방식으로 깨뜨려야 할 구시대적 편견이다.

소수자임을 드러내는 일이 '뉴스'가 되지 않길

게임회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 겸 게임 디자이너인 제프리 카플란(Jeffrey Kaplan)은 오버워치 내에서의 여러 변화를 이끌어 왔다. 그는 여성 게이머들의 권리 확보와 차별 중단을 위해 만들어진 한국의 '전국디바협회'(한국인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를 2017년 공식석상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제프리 카플란은 오버워치 게임 내에서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방향의 변화를 계속 추구할 것임을 이야기한 바 있다.

또한 '게임 내에 흑인 여성 캐릭터를 충원할 필요가 있다'는 한 팬의 편지에 카플란은 '서로 다른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지 않길 바란다(It needs to not be newsworthy)'라고 답장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런 행보를 볼 때, 여전히 게임계에서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놀라운 뉴스'가 되고 있음을 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게임 '오버워치' 캐릭터들 모습. 현재까지 제작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트레이서, 솔져76은 성소수자이며 아나는 여성 노인, 정크랫은 장애인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루시우는 흑인, 송하나와 한조 등은 동양인 캐릭터로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게임에 반영했다. 사진은 오버워치 공식 유튜브 영상 중 한 장면.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게임 '오버워치' 캐릭터들 모습. 현재까지 제작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트레이서, 솔져76은 성소수자이며 아나는 여성 노인, 정크랫은 장애인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루시우는 흑인, 송하나와 한조 등은 동양인 캐릭터로 다양한 인종과 성별을 게임에 반영했다. 사진은 오버워치 공식 유튜브 영상 중 한 장면. ⓒ 오버워치 유튜브 갈무리

 
페미니즘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배우 메릴 스트립은 지난 2015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영화계 내 여성 감독이 적은 상황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트립과 카플란의 말마따나, 우리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그리 다양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는 비단 영화계와 게임업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 근래에 꾸준히 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백인-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콘텐츠 시장 내에서 제한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선택지의 양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을 개선시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화적 콘텐츠란 곧 상상에 현실을 반영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정치적올바름 소수자 오버워치 메릴스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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