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재판에 서는 호프

원고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재판에 서는 호프 ⓒ 알앤디웍스

 
창작 뮤지컬로 첫 선을 보이고 있는 뮤지컬 <호프>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유대계 독일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원고가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면서 오랜 세월 읽히지 못한 이야기다.
 
손에서 손으로 지켜진 원고
 
작품은 실화를 각색해서 만들었는데 법정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피고는 에바 호프, 상대 측은 이스라엘 도서관이다. 호프가 가지고 있는 원고의 소유권을 두고 무려 30년째 재판 중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현재와 원고를 둘러싼 과거 일들이 나온다.
 
원고를 쓴 사람은 요제프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글은 절망뿐이라며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죽기 전에 친구였던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트에게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요제프의 글이 빛나는 걸 알았던 베르트는 원고를 지키는 데 몰두한다.
 
그러다 2차 세계 전쟁이 터졌다. 체코에 살았던 베르트는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자 그의 원고를 자신의 연인 마리에게 맡겼다. 마리는 혼란스러운 전쟁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원고를 품에서 지킨다. 포로 수용소에 갇혔을 때조차 원고를 한 번도 손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그 다음 원고의 주인은 작품의 주인공이자 마리의 딸인 호프다. 작품은 호프의 생애를 보여주면서 원고에 얽힌 이야기와 원고를 지키던 사람들의 심정을 다루고 있다.
 
 호프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호프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 알앤디웍스


평생 원고를 지킨 호프... 넘버가 아쉽다
 

78세 에바 호프는 재판장 내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동문서답을 하거나 침을 뱉는 등 괴팍하기도 하다. 그런 호프가 유일하게 곁에 두는 게 K다. K는 책이다. 원고가 의인화된 인물로, 쓰였지만 한 번도 읽힌 적이 없다. 호프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이 외에 젊은 시절의 호프, 엄마 마리, 요제프, 제르트, 호프에게 다가왔던 남자 카델 등 호프의 기억 속 인물들이 나온다.
 
<호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공연이 끝나고도 흥얼거리게 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없다는 점이다. 넘버 하나씩 존재감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모든 넘버의 분위기가 비슷하다. 작품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고 무거운데 노래마저 그런 편이다. 한 곡씩 따로 떼서 보면 좋을지 몰라도 한 작품 속에 모여 있으니까 비슷하고 단조로운 느낌이 들었다.
 
지루한 중반부, 몰입 최고의 후반부
 
또한 중반부 전개가 늘어져서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호프가 재판장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예전 사건들이 나열된다. 분명 하나하나 작은 사건은 아닌데도 잔잔한 분위기다. 회상 장면에서는 호프가 무대 뒤쪽, 사이드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연출을 했는데 과거와 현재가 적절히 오가기보다는 공연 줄거리에 소개되는 내용들이 나열만 되니 재미가 없었다. 노인 호프의 캐릭터 설정이 독특하고 돋보였던 탓인지 그런 캐릭터를 두고 과거 인물들 위주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쉬웠다. 그래서 공연 중반부 내내 속으로 호프가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솔로 노래가 나오기를 바랐다.
 
물론 주인공 호프의 비중이 작은 건 절대 아니다. 무대에서 퇴장이 거의 없을 정도로 어느 장면이든 계속 연기 중이다. 과거를 회상할 때면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고 젊은 호프 뒤에서 같이 대답하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 어떤 연기를 하던 존재감은 최고다.
 
<호프>는 후반부로 갈수록 좋아진다. 특히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현재의 노인 호프가 중심으로 나오자 작품은 절정으로 향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호프랑 케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그 동안의 감정을 터뜨리는데 그 동안 아쉬웠던 모든 내용들이 잊힐 정도였다. 아쉬웠던 넘버도 호프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그저 좋게만 들렸다. 원고가 없어도 자신은 '에바 호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걸린 수많은 시간들이 호프의 눈빛과 목소리로 지나갔다. 그 오랜 세월 원고를 지키면서 겪었던 호프의 감정이 다 몰아친다. 거기에는 집착도 있고 원망도 있고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케이도 그걸 알기에 그 동안 호프 곁에 있었고 그녀를 마침내 안아준다.
 
단연 돋보이는 호프
 
<호프>는 배우 캐스팅이 발표되자마자 화제였다.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단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호프 역의 김선영, 차지연 배우다. 작품을 보고 나오는 순간 왜 호프 역 캐스팅에 '힘을 줬는지' 이해했다. 괴상한 할머니로 연기를 하면서 거의 모든 장면에서 주체가 된다. 극 중앙에 나와 직접 이야기를 끌고 갈 때는 물론이고 무대 가장 사이드에 있을 때도 눈빛 하나만으로 호프를 보여줘야 한다. 호프가 부르는 대부분의 넘버는 어렵기도 어렵지만 그 감정이 어마어마하다. 특히 후반에서 호프가 무반부로 노래를 시작할 때 객석 전체가 숨죽이고 감동하는 걸 느꼈다.
 
반면 다른 인물들은 답답하고 앞뒤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편이다. 엄마 마리는 호프를 사랑했지만 원고를 손에 든 순간 집착에 눈이 멀어 모든 걸 포기한다. 그는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그저 원고가 상하지 않았는지를 먼저 살핀다. 베르트, 카델도 느닷없이 돌변해서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워 보였다.
 
뮤지컬 <호프>를 제작한 회사인 알앤디웍스는 독특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록키호러쇼>, <마마돈크라이>, <더데빌> 등 라이센스부터 창작뮤지컬까지 한결같은 작품 특색을 가지고 있다. 스토리는 다소 개연성이 없고 난해하지만 파격적인 연출과 중독성 강한 넘버가 특징이다. 그런데 이번 <호프>는 알앤디웍스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갈 만큼 이전과 달랐다.
 
그런데 그 중에서 독일인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경매 장면'을 보고 '그렇지 이게 알앤디웍스지' 싶었다. 경매자와 경매 참여자들은 손을 이용해 암전 퍼포먼스를 했다. 장갑들이 컴컴한 무대 허공에서 절도 있게 떠다녔다. <호프>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신선했다. 극 전반적으로 시대상에 충실한데 경매 장면에서 현대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경매'라는 놀라운 신세계를 보게 된 호프의 감정에 어울리는 연출이었다. <호프>의 전체적인 안무는 무용 느낌이 강한데 그와 대조적인 장면이라 신선했다.
 
 케이가 호프를 안고 있다.

케이가 호프를 안고 있다. ⓒ 알앤디웍스


작품의 여러 면을 하나씩 살펴보면 아쉬운 점도 꽤 있다. 그렇지만 후반부 호프랑 케이가 보여준 몇 분만으로 충분했다. 과거 이야기를 듣기 전 호프의 모습과 듣고 난 뒤의 78세 노인 호프는 분명히 다르게 보인다. 괴팍한 성격도 싫지 않고 원고에 대한 애틋함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평생 원고를 지킨 호프의 심정은 공감하지 못했지만 <호프>를 보면서 감동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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