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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26사태 후 노도광란의 한국현대사는 무위당이라 자호하며 소외되고 설운 사람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자 한 장일순에게 다시 무거운 부채감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일당의 12ㆍ12 하극상과 5ㆍ17쿠데타, 광주시민 학살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70년대 민주화의 성지였던 원주가 5ㆍ18광주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광주가 그 바통을 이어 받았다.
  
부산근대역사관에 전시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현장 검증 사진.
 부산근대역사관에 전시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현장 검증 사진.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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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은 전두환 5공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곳곳에서 저항의 불꽃이 이어졌고, 1982년 3월 18일 청년 학생들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나타났다.

1982년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부산지역의 대학가에 시위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대학생들은 3월 2일 「살인마 전두환 북침 완료」라는 제목의 "부산시민들이여 총궐기하자. 군부 정권 타도하자"는 내용의 벽보 20매를 부산대 의대 부속병원 정문 앞 육교 기둥 18개소에 붙인 뒤 부산 시내에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3월 18일에는 김현장ㆍ김영애ㆍ문부식ㆍ김은숙ㆍ김화석, 박정미가 12ㆍ12사태 때 신군부의 군사 행동을 방조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3일 위컴 한ㆍ미연합군사령관이 연합사 소속 병력의 광주 시위 진압에 동의하는 등 미국이 광주학살 및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지원ㆍ인정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였다.
 
이들은 부산 미문화원 현관에 휘발유를 붓고 방화한 후,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문화원 내에서 책을 보고 있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주석 1)
  
부산시 중구 대청동에 위치한 옛 미문화원
▲ 부산시 중구 대청동에 위치한 옛 미문화원 부산시 중구 대청동에 위치한 옛 미문화원
ⓒ 김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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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화원 방화사건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로 제시되었다. 학생들은 방화의 동기에 대해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5ㆍ18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 이라고 밝혔다. 
 
전두환 정권은 현상금 2,000만원을 건 체포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이들의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광주항쟁의 불꽃이 유신을 전복시킨 부마항쟁의 중심지에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이어지고 주동자들이 '현상붙은 범인'의 신분으로 원주를 피신처로 찾은 것이다.
 
"먼저 광주항쟁으로 수배를 받던 김현장 씨가 원주를 찾아 은신한데 이어 주범이면서 용공분자로 몰려 당국의 수배를 받던 문부식과 김은숙 씨까지 선배를 찾아 원주로 향한 것이다." (주석 2)
 
이들을 숨겨주었던 원주가톨릭교육원장 최기식 신부 등이 1982년 4월 5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구속되고, 관계자들이 큰 고초를 치뤘지만, 이런 결과 원주민속연구회가 결성되고, 원주는 다시 민주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연세대 원주캠퍼스와 상지대, 원주대 등 대학을 중심으로 민속연국회가 조직되는 등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의식화 모임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여기에 1985년 전국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비롯해 이창복, 김승오 신부, 김기봉 씨 등이 합류하며 전국규모의 재야연대 조직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주석 3)
 
불타오르는 미문화원
▲ 불타오르는 미문화원 불타오르는 미문화원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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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은 유신정권보다 더욱 심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날로 강화되고 고문ㆍ의문사 등 희생자가 늘었다. 이에 대한 저항도 그만큼 격렬해졌다. 투신ㆍ분신ㆍ자결 등 극한방법이 동원되었다.
 
부산미문화원 사건의 피신자들을 도왔던 장일순은 고민이 깊어갔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기에는 힘의 우열이 너무 심한 상태에서 승패는 뻔한 것이었다. 독재세력에는 공권력이라는 무장된 폭력이 주어졌다. 
 
원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이창복 씨의 증언에서 이 시기 장일순의 심리적 갈등의 일면을 보게 된다.
 
1979년 10ㆍ26 사태로 80년대에는 '민주화의 봄이 오나 했더니, 12ㆍ12쿠데타로 등장한 소위 신군부 세력이 더욱 강화된, 본격적인 군사독재를 이어가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민주 진영은 (저항이) 더욱 치열해지게 됩니다. 80년에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도 발생하고 서울에서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나는데, 70년대 후반도 격렬했지만, 그 못지않게 80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저항에 대한 정부의 진압 방식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다 보니 거기에 대항하는 도전 방법도 상당히 폭력화되는 양상을 띠게 되지요.
 
무위당 선생께서는 인간 그 자체의 나약함과 인간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 민주화투쟁을 하는데 그 방법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해치고 생명을 해치는 반생명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고민하시게 되지요.
(주석 4)

장일순은 생명사상의 논지에서 극렬투쟁보다 비폭력 무저항운동론을 제시하였다. 더러는 오해도 하고 배척도 되었다. 투항주의자라는 심한 말도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장일순은 민주전선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1983년 여름 민주세력을 다시 결집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민족통일국민연합을 결성하는데 장일순은 모닥불 역할을 하였다. 과격한 투쟁 대신에 공개ㆍ투명ㆍ대중성을 바탕으로 하자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국민연합'이 국민의 성원 속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자 장일순은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헌신한다.

주석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민주화운동사연표』,「3ㆍ18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403쪽, 2006.
2> 강원일보사,「민주화의 성지ㆍ원주를 다시 본다」,『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22호, 2007, 겨울. 
3> 앞과 같음.
4>「이창복선생 인터뷰」,『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19호, 2007. 봄.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전두환,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한살림,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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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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