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1월 3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독립운동가 411명의 서훈 신청하면서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1월 3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독립운동가 411명의 서훈 신청하면서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3·1만세시위(3·1의거)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 411명에 대한 서훈포상 신청이 한꺼번에 이루어져 관심을 끈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64) 박사가 3일 창원에 있는 국가보훈처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포상 신청했다. 이 박사는 의병투쟁과 3·1만세시위, 반일투쟁 등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 411명의 기록을 정리한 자료를 제출했다.

그 분량만해도 A4 용지 3500장에 달한다. 이 박사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판결문과 오랫동안 연구해온 의병 관련 자료들을 대조해, 아직 포상이 되지 않은 항일투사의 기록을 정리했다.

이들을 지역별로 보면, 경남 출신이 181명으로 가장 많고 전북 55명, 경북 53명, 함경도 32명 등이다. 서훈 신청자 가운데는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임춘서(경북)·김군락(울산) 선생이 들어 있다.

또 의병투쟁하다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던 김도언(울산)·심종근(경남 의령)·조성순(창원), 종신형을 언도 받았던 김해운(경남 안의), 징역 10년의 차봉학(통영) 선생 등이 있다.

동맹파업 반일운동 관련으로 징역 4월을 언도받았던 유삼두·곽명옥·조운옥·박용수(이상 경남 고성), 태형90도를 언도 받은 남봉룡·김용수 선생 등이 서훈신청자에 포함되어 있다.

3·1만세시위 가담자도 많다. 징역 6월을 언도받았던 감태순(창원), 징역 5년의 고재경(함양), 징역 1년의 구명순(김해), 징역 10월의 이봉정·김도운(합천), 징역 1년 6월의 김성도·김우현(김해) 선생 등도 서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정부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와 같은 투쟁을 했지만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들도 찾아냈다. 
 
경남 남해 출신의 김두관 의사(왼쪽)와 하동 출신의 조복애 의사.
 경남 남해 출신의 김두관 의사(왼쪽)와 하동 출신의 조복애 의사.
ⓒ 이태룡

관련사진보기

 
대표적으로, 김군락(1869~1908) 선생은 임춘서 등 다수의 의병과 함께 1907년 언양읍내를 습격하고 일본 순사주재소에 방화하여 전소시켰으며, 군자금 모금 등 다양한 의병투쟁을 벌이다 붙잡혔다. 그는 1908년 10월 13일 진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그해 11월 14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순국했다.

또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白麟濟) 선생도 있다. 이태룡 박사는 그에 대해 "22세 때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학생으로서 독립운동에 대한 모의를 하고,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수백명과 함께 체포되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거쳐, 11월 6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구류기간 281일 동안 서대문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고 밝혔다.

이태룡 박사는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를 벌였다가 퇴학을 당하거나 서대문감옥에서 구금생활한 이들 가운데 당시 경성의전과 세브란스의전, 보성고보 등 학생은 200여명이었다"며 "그런데 그들 가운데 아직도 포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백인제 등 60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3·1만세시위 이후, 일제는 학생 탄압에 이어 영호남 교사 78명을 비롯한 지식인 200여 명을 '공산주의자'로 덤터기 씌웠고, 교사들을 파면하고 학생들을 퇴학시킨 후 옥살이시키기도 했다"며 "그런데 아직까지 그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번에 낱낱이 발굴해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이른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가둬 가혹한 형벌을 가했던 재소자 2000여명 중, 사진과 간략한 신분시항만 남아 있는 항일투사를 발굴해 이번 포상 신청에 포함시켰다"고 강조했다.

이번 포상 신청에서 경남 출신이 유독 많은 이유에 대해, 그는 "진주법원이 1949년 10월 27일 방화로 불탔고, 판결문 등 자료가 소실되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한말 진주법원이 관할했던 의병과 3·1만세시위, 임시정부 후원금, 의열단사건 등에 관한 기록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진주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항소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대구복심법원 등에 남아 있었고, 이번에 관련 기록들을 추적해내다 보니 경남지역이 많아진 것"이라고 밝혔다.

오랫동안 의병을 연구해온 그는 "일제에 의해 왕비가 참살을 당해 일어선 진주의병이 1만여 명이었고, 국권회복을 위해 덕유산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의병에 나섰다가 살상당한 의병의 숫자만 3000여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어 "경술국치 후 일제의 차별 대우에 맞섰던 고성지역 어부들의 동맹파업, 순국자가 320명이나 됐던 창원 진동만세시위도 있었다"며 "경남 서부지역 3·1만세시위 때 순국했거나 혹독한 옥살이를 했던 분들에 대하여 후손들이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1월 3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독립운동가 411명의 서훈 신청하면서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가 1월 3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독립운동가 411명의 서훈 신청하면서 관련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이번 포상 신청과 관련해, 이태룡 박사는 "'조센징, 빠가야로'. 이는 70여 년 전까지 일터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들었던 말이다. 그 소리에 귀를 막았던 분들도 이젠 저승으로 간 지 수십 년이 흘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피를 흘리고 숨져간 임들의 숨결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1948년 광복된 지 3년 만인 대한민국 정식 정부를 세웠다. 수십 년 동안 외세에 의해 국권이 흔들렸고,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잃었다가 되찾은 지도 무려 70년이 넘었고, 올해는 국호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며 "사람으로 치면 손자, 증손자의 재롱을 보고 저세상으로 갈 나이가 지난 세월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새해 들어 의병과 3·1만세시위, 반일활동을 하다가 목숨을 바쳤거나 옥살이를 한 분들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여 포상 신청을 하는 게 후손의 도리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역사 속의 인물은 후세에 평가되고, 아울러 그 평가는 그 때에 나올 수밖에 없지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옥살이를 하고, 급기야 목숨까지 바친 분들에 대한 포상마저 후세의 몫이라며 그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는지,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태룡 박사는 30여 년 전부터 의병연구를 해오는 동안 약 1100명의 의병에 대한 포상신청을 했고, 그 중 430여명에 대한 서훈 추서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8월 광복절 73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177명을 포상했는데, 이 중 의병 포상자 48명 가운데 44명은 이 박사가 신청한 것이었다.

국가보훈처 경남동부보훈지청은 이태룡 박사가 낸 포상 신청에 대해 검토하기로 했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는 1월 3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독립운동가 411명의 자료를 모아 서훈 신청했다. 관련 자료는 무려 3500장에 달한다.
 (사)의병정신선양중앙회 의병연구소장인 이태룡 박사는 1월 3일 경남동부보훈지청을 찾아 독립운동가 411명의 자료를 모아 서훈 신청했다. 관련 자료는 무려 3500장에 달한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태그:#이태룡 박사, #의병, #3.1만세시위, #국가보훈처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