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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묵란-어머니>.
▲ 무위당 장일순 <묵란-어머니>. 무위당 장일순 <묵란-어머니>.
ⓒ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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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사람이라 하여 문장이 인격의 반영임을 말한 사람이 있지만 글보다도 더욱 인격을 반영한 것이 글씨인 것이다."

시인논객 조지훈의 「글씨의 미(美)」에 나온 말이다.

장일순의 글씨는 독특하다. 그 나름의 필체인 것이다. 우리나라 서예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석봉체', '추사체' 등이 정석처럼 자리잡았다. 장일순은 이같은 '정통서체'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필체를 개발하였다. 개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는 글씨였다. 

글씨를 가르쳐 준 분은 할아버지도 가르쳐주셨지만, 차강 박기정 선생이라고, 17세 때부터 배웠어요. 이 분은 워낙 선비집안인데 통감부가 생기니까 낙향을 해서 강원도 지방 평창 도암에 내려와 사시면서 평생을 묵객(墨客)으로 지냈지요.

20세 때는 유인석 장군 밑에서 의병투쟁도 했구요. 그래서 일본애들이 그 양반 글씨를 못 받아갔어요. 이 분은 묵객생활로 번 돈을 쓰시면서 남은 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거지. 루트를 통해서 해외에 보냈지.
(주석 1)
 
무위당 장일순 <묵란>.
▲ 무위당 장일순 <묵란>. 무위당 장일순 <묵란>.
ⓒ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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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배움의 뿌리가 다르다. 한량 묵객들의 서체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독립운동가 출신과는 격과 결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일순은 박기정 선생의 필법에 자신의 맑은 정신을 배합하여 '무위당 필체'를 개발한 것이다.

장일순은 1990년 『생활상서』 편집부장과의 대담에서, 출감 뒤 다시 글씨를 쓰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책만 보고 있을 수는 없더군요. 살기 위한 것마저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으니…. 서울로 유학가면서부터 그만두었던 붓글씨를 그때 다시 쓰게 되었지요. 동양에 있어서 예도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인데, 그러려면 무아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나중엔 참으로 자연과 합일되는 경지까지 가야 하는데…."

그는 자신의 작품이 늘 못마땅하고 장난처럼 여겨져 버리곤 하는데 정 누군가가 해달라고 부탁하면 안해드려도 좀 교만한 것 같아 흉치 않은 정도가 되면 주기도 한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제자나 이돈명ㆍ송건호ㆍ리영희 씨 등의 회갑논문집 등에 실린 그의 서화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볼 줄 아는 이들은 영서지방 정통의 묵맥을 이었고 그의 청정한 삶이 녹아 있는 글씨라고들 한다.
(주석 2)

장일순은 휘호 얘기가 나오면, "글씨가 반드시 삶속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삶과 동떨어진 글씨는 죽은 글씨라는 것이다. 또한 예술은 거짓없는 인생을 건 작업이며 전통은 그때 그때의 창작이었기 때문에 전통에 대한 철저한 공부를 당부하고 있다." (주석 3)

이것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의 서예관이자, 생명서예가로서 숨이 살아있는 작품이 나오게 되는 바탕이었다. 붓의 형상을 뛰어넘어 세속의 속기를 초월하지만 결코 세상을 버리지 않았고,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도 저항하기 보다는 세상을 끌어 안아 주는 것을 혁명이라고 하셨으며, 인위적임을 내세우기보다는 스스로 그렇게 자연스러운 무위사상을 붓이라는 물건을 통해 생활속의 느낌을 하나하나 작품화하여 세상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4)
 
무위당 장일순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나, 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 무위당 장일순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나, 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무위당 장일순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나, 하나 마저도 지키지 말라>
ⓒ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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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의 글씨와 관련 많은 비화와 삽화가 전한다. 글씨의 모양새보다 정성과 생명력을 중시하는 내용이다. 두 편을 골랐다.

양승학은 가톨릭회관 지하에서 수족관을 하고 있다. 장일순은 그 근처에 갈 때면 가끔 양승학을 만나기 위해 수족관에 들렀다. 그곳에서 장일순은 양승학이 타서 내놓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양승학이 장일순에게 물었다.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선생님, 어떤 글이 정말로 훌륭한 글입니까?"

일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길을 가다가 자네도 아마 봤을 거야. 왜 리어카나 포장마차에 '군고구마 팝니다' '붕어빵 팝니다' 하고 써 놓은 글이 있잖아? 그런 글이 정말로 살아 있고 생명력이 있는 글이야. 꼭 필요한 글이지."
(주석 5)

가톨릭 농민회 초대 회장이었던 조한수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김익호는 조한수의 무덤에 세울 묘비의 비문을 장일순에게 부탁했다. 약속한 날짜에 비문을 찾으러 가 장일순이 써놓은 글씨를 보니 김익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툴러 보였다.

김익호는 느낀대로 솔직히 말했다. 

"선생님. 글을 되게 못 쓰셨네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자네. 아직 멀었네. 이쁜 글씨가 잘 쓴 글씬 줄 아는가 본데 그렇지 않다네. 잘 쓴 글씨란 그저 정성껏 자신의 진실을 밝히면 되는 걸세."
(주석 6)

장일순의 그림과 글씨가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주위 사람들이 전시회를 열자고 제의하였다. 평소 형식적이고 요란한 행사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은 성격이지만, 민주인사(구속자)와 불우 이웃을 돕자는 설득에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첫 개인전은 1975년 12월 19일부터 22일까지 원주가톨릭센터에서 열렸다. 그동안의 여러 작품이 전시되고 많은 시민ㆍ학생들이 참관했다.

두번째는 1976년 4월 7일부터 10일까지 강원일보사 초청으로 춘천도립문화회관에서, 세번째는 1977년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원주가톨릭센터에서, 네번째는 1981년, 다섯번째는 같은 장소에서, 여섯번째는 1988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생전의 마지막 전시회는 1991년 서울과 원주에서, 그리고 유작전이 1998년부터 원주ㆍ서울ㆍ광주ㆍ목포ㆍ청주ㆍ충주ㆍ대전ㆍ전주ㆍ경산ㆍ성남 등 각지에서 열려 작품이 널리 소개되었다.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은 그 말의 참뜻이 유지되는 한에서 재야서가(在野書家)의 글씨이며, 우리시대 마지막 문인화가(文人畫家)의 글씨이며, 회화세계이다. 그리고 그 예술이 목표로 하는 바의 미적 이상은 일격(逸格)의 예술이다. (주석 7)

주석
1> 「새로운 문화와 공동체 운동」, 정현경 대담,『대화』, 1991년 여름호.
2> 송향숙,「늘 깨어있는 사람」,『생활성서』, 1990년 6월호.
3> 채희승,「글씨는 삶에서 나와야 한다」,『무위당사람들』38호, 2011. 12.
4> 앞과 같음.
5> 최성현, 앞의 책, 259쪽.
6> 같은 책, 267쪽.
7> 유홍준, 「무위당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최성현, 앞의 책, 29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장일순, #시서화, #서예, #차강 박기정 선생, #무위당 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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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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