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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무진역경 인욕도행 -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어려운 경우는 욕된 것을 참는 일이니라>
▲ 무위당 장일순 <무진역경 인욕도행 -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어려운 경우는 욕된 것을 참는 일이니라> 무위당 장일순 <무진역경 인욕도행 -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어려운 경우는 욕된 것을 참는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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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명장 최영 장군을 두고 '입상출장(立相出將)'이라 하였다. 평시에는 유능한 재상이고 전시에는 용맹한 장수라는 뜻이 담긴다.

그는 문하시중의 높은 벼슬을 하고 왜구와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한 출중한 장군이었다.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가장 먼저 살해한 것은 최영의 문무양겹의 역량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장일순은 평소 온화한 성품대로 일상적인 생활을 즐기는 범부다. 튀거나 나서기보다 사색하고 책읽고, 틈나면 시ㆍ서ㆍ화에도 열중한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먹장난'으로 쓴 글씨와 그림이 입소문을 타고, 구속학생과 민주인사들의 영치금, 또는 이들의 후원회 기금 마련으로 요청되었다.

그의 시ㆍ서ㆍ화는 처음부터 상업성이 아니었기에 더욱 빛이 나고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유신과 5공시대에 양심수가 늘어나면서 구속자가족협의회 등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재야 단체가 생겨났다.

하나같이 생활이 어렵고 활동자금이 없었다. 일부 종교단체와 해외 인권단체의 기부금이 들어왔지만 워낙 구속자가 많아서 턱 없이 모자랐다. 해서 생긴 것이 '기금모금 서화전'이었다.

장일순은 그때마다 흔쾌히 그림을 그려주고 글씨를 썼다. 고명한 서예가나 명사들이 '공짜 글씨와 그림'을 거부할 때도, 그는 열과 성을 다하였다. 몇 차례 본인의 이름으로 시화전을 열어서 생긴 기금을 모두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그러다보니 청탁하는 사람과 단체가 늘고 그만큼 바빠졌다.

장일순의 구도자적인 온화함의 외면과 저항가적 행위의 내면을 종합하면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잠언이 떠오른다. 

그의 행동철학은 혁명가적이고 전사의 기질을 품었고, 품성은 낭만주의적이고 사색형이며 예술과 시문을 즐기는 풍류적 기질이다. 감시받고 배를 곯으면서도 난을 치고 글씨를 쓰는 취향과 여유를 갖는 풍류묵객이었다.

공적으로는 신념과 대의를 위해 서릿발과 같은 준열함을 보이고, 사적으로는 마을 정자 앞에 우뚝 선 한 그루의 거목처럼 여유있고 흔들리지 않아서 이념ㆍ출신ㆍ노유를 가리지 않고 그의 그늘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아나키스트의 담백함과 초연함은 계산을 모르는 철학자의 모습이었다.
  
무위당 장일순 <묵란>.
▲ 무위당 장일순 <묵란>. 무위당 장일순 <묵란>.
ⓒ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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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은 대나무나 솔도 그렸지만 특히 난을 많이 쳤다.

조선의 선비들은 난초를 개결함의 상징으로 보았다. 누구라도 사군자 중의 으뜸인 난을 그릴 수 있지만, 권부를 탐하거나 지절을 잃은 자의 작품은 격에 맞지 않다. 

조선시대 신숙주나 정인지의 작품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1454년~ 1492)의 작품을 몇 배나 높이 산다. 대원군 이하응의 호는 석파(石坡)였다. 세도가 대원군 시절의 작품은 파락호 시절의 석파난을 당하지 못한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은 만석의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바치고 중국 베이징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는 몇 끼씩 굶으면서도 난을 치고 퉁수를 불며 스스로를 달래고 청년지사들을 격려하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지성이었던 정인보는 만해 한용운을 위한 조시(弔詩)에서 만해의 풍모를 '풍란화 매운 절개'에 비유하였다. 

풍란화 매운향내 당신에야 견줄손가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런가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장일순은 난초를 닮은 구석이 많아 보인다. 뛰어나지 않으면서도 빼어난 기품이 있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난은 산속 바위 틈에 외롭게 피어있는 것 같아도 그 향기가 궁벽한 마을까지 번져나가듯이, 그는 민초들 속에 묻혀 살면서도 맑은 지성과 깨어 있는 야성 그리고 훈훈한 인성을 품어냈다.
 
무위당 장일순 <나무아미타불>
▲ 무위당 장일순 <나무아미타불> 무위당 장일순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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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의 난초는 참으로 독창적인 것이다.
그는 난초를 치면서 고귀한 멋이나 곱상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춘란(春蘭)이나 기품을 앞세운 건란(乾蘭)은 즐기지 않는다. 장일순의 난초는 한마디로 조선 난초이다.

잎이 짧고 넓적하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잡초 같은 난초를 좋아한다. 그것도 바람결에 잎을 날리면서 꽃줄기만은 의연히 세우고 그 향기를 펼치는 풍란(風蘭)을 즐겨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화제(畵題)를 붙인다.

장일순의 난초 그림에서는 맑은 품성과 강인한 생명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 - 장일순이 주창하는 생명사상과 정신을 표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난초는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는 힘차고 건강하고 소탈한 심성의 인간상에 들어맞는 민초도(民草圖)로 전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주석 1)

장일순이 남긴 서화 중에는 난초 그림이 유난히 많았다.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들이 그랬듯이, 그도 자신과 난을 일체화시켰을 것이다. 하여 사군자 중에서도 난을 많이 쳤다.

"난초를 그린다고 하지 않고 친다고 한다. '친다'라는 역학 동사는 '눈보라 친다', '떡메로 내려친다' 할 때처럼 격렬한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면서 솟구치는 억울함과 분한 마음 그리고 응어리진 분노를 분수처럼 밖으로 시원스럽게 쏟아내는 행위는 분명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치는 것이라 해야 맞다." (이어령, 「난초」)

장일순이 난을 칠 때의 심경은 어땠을까.

중립화통일론을 내걸었다고 감옥에 가두고, 독재를 비판한다고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5개년 계획에도 민초들은 궁핍을 면치 못 하고, 근대화 명분 아래 자연을 마구 파괴하는, 독재자ㆍ반자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와 응어리를 '마구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난의 새싹에서 생명의 짙은 향기를 맡았지 않았을까 싶다.

주석
1> 유홍준, <무위당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좁쌀 한알』, 29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장일순, #난, #난초, #서화, #장일순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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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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