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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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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은 어느 때는 실천적인 행동인인가 하면 어떤 때는 고뇌하는 사색인이었다.

실천성은 민주화운동과 신협운동 등으로 이어지고, 사색의 결정은 생명운동으로 발현되었다. 그렇다고 생명운동을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의 울타리에 가두거나 관념의 울안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운동을 실생활에 연계시키고 시대적 가치로 사람들과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대체로 유명세를 타는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은 허장성세로 한몫을 하려든다. 허접한 논리나 공허한 구변으로 떠들고 주목을 받으려 한다. 장일순은 이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식인이 지식인다우려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가 기본이라는 인식이었다.

뜬구름 같은 주장이 아니라 이웃들에게 보탬이 되는 실용성을 중시하고, 자신은 그런 자세로 살았다. 포도농사를 할 때에는 일체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았고, 신협운동을 할 때에는 허튼 약속을 하지 않았다. 

지금 세계가 땅이 죽어가고 있어요. 근데 여러분들이 이 일에 함께 한다는 것은 자기를 살림과 동시에, 자기 사는 게 뭐냐, 땅을 살려야지. 땅을 살리게 되면 유익한 모든 미물이, 여러분들 들으셨겠지요, 개구리들 메뚜기들 거미들 모든 유충들이 거기서 우글거리고 살게 돼. 그러면서 벼를 더 건실하게 자라게 하고 땅을 비옥하게 해줘. 그래서 서로 환원이 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야. (주석 1)

한말 조선왕조는 무능한 군주와 탐욕적인 지배세력에 의해 국운이 크게 기울게 되었다. 양반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나라 밖 사정에 눈을 감고, 피지배 백성 중에는 부당한 압제에 저항하기보다 양반족보를 사서라도 기득권층에 편입되려고 재산을 모을 때, 최제우와 최시형 등이 후천개벽에 나섰다. 두 사람은 반역죄로 몰려 처형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뿌린 생명존중사상은 단절되지 않고 그 생명력이 이어졌다. 

박정희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권력에 빌붙어 독재를 미화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 역할을 하였다. 장일순은 여러 부문에서 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독재의 시대에 반독재, 반생명의 시대에 생명의 가치를 내걸고 주변의 작은 일부터 실천해나갔다. 반부패투쟁, 협동조합운동, 생명운동이 그것이다.

장일순은 사회정의가 증발되고 이성이 마비된 유신시대에 사색인으로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사색하는 지성인의 정도를 걸었다.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으나 멈추지 않았고, 사유의 폭은 넓었으나 편벽하지 않았고, 교우의 범위는 많았으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주석
1> 앞의 책, 4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생명사상, #생명존중사상, #동학사상, #최시형,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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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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