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미세먼지 자욱한 세밑의 오후가 을씨년스럽다. 흐린 하늘에 줄지어 긴 여정에 오른 후조들의 비행이 고즈넉하다. 수선스럽던 일상을 접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사이로 가로에는 하나둘 따스한 불빛이 밝혀지고, 멀리 산 그림자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채 마을로 내려온다. 청사 주변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나무들은 그 풍성하던 잎들을 모두 떨구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겨울을 채비하고 있다.

산 능선을 따라 앙상한 나목들이 서로 엉켜 열병식을 하듯 서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거친 비바람과 가뭄, 폭양에 부대끼며 여태껏 견뎌왔을 그네들의 몸피가 온통 상처투성이 일터인데도 상처를 이겨낸 의연함 때문인지 멀리서 보이는 풍경은 숙연하고 아름답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서문에서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무든 사람이든 보여지는 모습 뒤에는 숨겨진 상처로 얼룩져있다.
▲ 비탈에 선 겨울나무들 나무든 사람이든 보여지는 모습 뒤에는 숨겨진 상처로 얼룩져있다.
ⓒ 임경욱

관련사진보기

 
나이가 들어가면서, 특히나 이렇게 해가 바뀌는 시기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생채기 나고 찢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깊은 통증으로 다가온다. 사람 사이에 정제되지 않은 말들과 안하무인격의 행동, 사사로운 다툼으로 인한 마음의 간극, 그냥 지나쳐도 좋았을 크고 작은 일들이 상처가 되어 들어나는 것은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다하지 못한 사랑 때문이리라.

우주의 순행원리에 따라 4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1년을 12개월로 나누고 또 주단위로 쪼개 그에 익숙하게 적응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래도 상처의 모둠을 한 여름 뙤약볕이 아닌 이렇게 손 시린 추운 겨울에 어루만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진주는 그것을 품고 있는 조개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이겠지만 그로인해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사물과 생명체는 크든 작든 상처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할 때 아름다운 풍경과 모습으로 표출되어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상처를 아픔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현명하게 극복하고 쉬이 아물 수 있게 다독여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사회관계망이 복잡하고 탁한 세상에서는 사람들과의 사이, 직장생활, 가족 간의 갈등 등 온갖 관계가 다 상처로 전이될 수 있어서 내가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깊은 우울에 빠질 수도 있겠다.

작가 김수현이 그의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에서 상처의 원근법을 '가까운 것은 커 보이고, 멀리 있는 건 작게 보인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만 보지 타인의 상처는 보지 못한다. 사회가 급격히 진화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사고 속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챙길 겨를이 없는 모양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굳이 랭보의 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슴 속에 지니고 살아간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나는 올 한해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무엇으로 상처를 받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행여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용서보다는 먼저 타인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게 우선일진대,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용서를 구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날마다 새롭게 용서하는 용기이므로 우리 모두 용서하고 용서 받고,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가자. 빙점 이하로 곤두박질치는 경기지표가 말해주듯 사람들의 생활은 늘 팍팍하고 힘든데 사람 사이에 너그러운 용서와 따뜻한 배려마저 없다면 우리는 이 겨울을 무엇으로 나겠는가.

저 산과 바위가 풍상을 이기며 상처를 풍경으로 승화시키듯이, 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받은 버려진 폐가처럼 복구되지 않을 빛바랜 상처를 시간 속에 풍화시키며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야겠다.

저 산의 나무들이 북풍한설(北風寒雪)을 견디며 이 겨울을 의연하게 살아가듯이, 상처를 보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내자고 손난로 같은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건네야겠다.

태그:#풍경, #상처, #겨울나무, #손난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