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형사>.

<나쁜 형사>. ⓒ MBC

  
MBC 월화 드라마 <나쁜 형사>에는 연쇄살인을 자행하는 해괴한 검사가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살인 충동을 억제해 오지 못한 검사 장형민(김건우 분)은 무고한 여성들을 납치해 살인 욕구를 충족한다. 심지어, 근무 시간에 부하 직원 집에 몰래 찾아가 그 부인을 납치해 범행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의욕에 불타는 형사, 주인공 우태석(신하균 분)은 검사라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검사라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장형민을 잡는데 열을 올린다. 치밀한 '장'은 현장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범인임을 확신하는 우태석은 '장'의 흔적을 일부러 현장에 심어둔 뒤 '장'을 유도한다.
 
그 흔적을 없애고자 현장에 나타난 장형민은 우태석의 체포를 피하려다가 난간에서 떨어진다. 그를 구할 수 있었는데도 '우'는 구하지 않는다. 진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범죄 현장도 조작하고, 도주하는 범인의 신변안전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태석은 '나쁜 형사'다.
 
 장형민 검사(김건우 분).

장형민 검사(김건우 분). ⓒ MBC

  
인류는 오래도록 살인자의 범행 동기를 원한 같은 데서 찾았다. 그래서 개인적 원한과 무관하게 벌어지는 연쇄살인에 대해 현대 인류는 적잖은 당혹감과 공포심을 품고 있다. 연쇄살인이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넓게 보면 연쇄살인이라고 볼 만한 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수없이 발생했다. 그러나 대중은 물론이고 범죄학자들도 그것을 연쇄살인은커녕 살인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군주나 노비주(노예주)들이 벌인 연속적 살인 행위들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연쇄살인이 가장 많이 벌어지는 나라다. 범죄학자 이규화의 2006년 논문 '연쇄살인의 특징과 원인'은 "인구로는 세계 전체의 5%에 채 미치지 못하는 미국의 연쇄살인범이 세계 전체의 80%가 넘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쇄살인 대부분이 미국에서 발생하는 이유를 '지나친 경쟁체제로 인간소외가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관점이 범죄학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듯하다.
 
연쇄살인이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므로, 그것의 정의에 대해서도 미국측 견해를 참고하는 게 순리일 듯하다. 한국민간경비학회가 발행한 <한국민간경비학회보> 제7권에 수록된 위의 이규화 논문에 따르면, 미국 연방수사국(FBI)는 연쇄살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1) 범행 숫자가 세 건 이상일 것.
(2) 범행 장소가 세 곳 이상일 것.
(3) 각 범행 사이에 정서적 냉각기가 존재할 것.
 
(3)은 각각의 범행이 각기 다른 감정상태에서 저질러졌을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오후 9시부터 10시 사이에 계속된 동일한 감정상태에서 발생한 다수의 살인은 연쇄살인으로 치지 않는다. 군중이 운집한 광장에서 욱 하는 기분으로 단시간에 여럿을 연달아 죽인 행위는 연쇄살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이 범죄자가 마음을 가라앉힌 뒤 새로이 특정 심리에 빠져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되풀이돼야 연쇄살인이 되는 것이다.
 
FBI와 달리 미국 국립사법연구소(NIJ)는 (1)과 (2)을 완화해 다음과 같이 연쇄살인을 정의한다. 이규화 논문을 그대로 옮긴다.
 
"단독 범인에 의해,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별개의 사건으로 행해진 둘 이상의 연속된 살인. 이 일련의 범죄는 몇 시간에 걸쳐서 저질러질 수도 있고 몇 년에 걸쳐 이어질 수도 있다. 범행의 동기는 대개 심리적인 것으로, 범행 형태나 범죄 현장에 남겨진 물적 증거들이 살인의 가학적·성적 함축을 반영하고 있다."
 
NIJ는 FBI처럼 '3건 이상의 범행'을 요구하지 않고 '3곳 이상의 장소'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범죄자가 특정 심리에 기인해 연달아 벌이는 살인을 연쇄살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태석 형사(신하균 분).

우태석 형사(신하균 분). ⓒ MBC

  
이제까지 대중이 연쇄살인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그래서 역사서에 연쇄살인은커녕 살인으로도 기록되지 못한 군주·노비주의 연쇄살인은 위의 (3)과 충돌할 여지가 있지만, 하나의 범죄자에 의해 여러 장소와 여러 시간대에 걸쳐 벌어졌을 뿐 아니라 비정상적 심리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는 점에서 연쇄살인과 크게 다르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대표적 폭군으로 손꼽히는 은나라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의 살인마적 연쇄살인 행각에 관해 사마천의 <사기> '은나라 본기' 편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의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주왕 정권의 재상들이다.
 
"구후가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바쳤다. 구후의 딸이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대노한 주왕은 그를 죽인 뒤, 구후를 산 채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악후가 강하게 만류하며 따지자, 악후까지 포를 떠서 죽였다."
 
여기서 주왕이 죽인 대상은 세 명이다. FBI가 볼 때도 연쇄살인이다. 이런 류의 살인이 주왕 같은 폭군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은 아니다. 사도세자 같은 개혁적 인물도 아랫사람 죽이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사도세자의 행각은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 <한중록>에 적혀 있다. 이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중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도세자를 경험했던 궁녀나 내시들이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상황에서 혜경궁 홍씨가 남편의 행각을 상상력으로 지어낼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의 정신적 문제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 정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근거도 없이 남편을 '살인마'로 만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중록>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그 해'는 1757년이고, '6월'은 음력 6월이며, '소조'는 사도세자를 지칭한다.
 
"그해 6월부터 화증이 더하시어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셨다.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라는 것을 먼저 죽여 머리를 들고 들어오시어 나인들에게 높이 들어 보이셨으니, 나는 사람 머리 벤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흉하고 놀랍기 이를 것이 있으리오. 소조(小朝, 임금 대행 왕세자)께서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나인 여럿이 상하였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사도세자처럼 아랫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노비주인들한테 이따금 있었다.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자면 책이 여러 권 나와도 부족할 정도다.
  
 영화 <사도> 한 장면

영화 <사도>의 한 장면 ⓒ 타이거픽처스

 
조선 중기에 명재상으로 유명했던 유진동(1497~1561년)도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했다. 작문·글쓰기·그림이 뛰어났던 그는 공조판서(국토건설부장관)와 오위도총부 도총관(장관급)을 지냈다. 됨됨이가 훌륭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물론 이 평가는 같은 입장인 노비주나 사대부들이 내린 것이다. 대학자인 어우당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유진동이 벌인 일을 다음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술했다.
 
"처가집 노비가 공손하게 행동하지 않자, 쇠채찍으로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어우야담>에 기록된 유진동의 살인행위는 이것 하나뿐이지만, 이 한 대목만 봐도 그가 아랫사람 죽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주왕·사도세자·유진동 같은 인물을 범죄자로 간주하지 않았다. 주왕의 살인 행각은 형벌 집행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됐다. 유진동의 행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비주인이 관청에 사전 신고만 하면 노비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시대였다. 사전 신고를 안 해도 "경황이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서유영의 <금계필담>에 따르면, 정조 때 유명 시인이자 관료였던 이서구는 노비가 술김에 자기 이름을 부르자 그를 죽인 뒤 "만약 신고하면 수치스럽게 될까봐 신고하지 않았다"는 말로 수사기관의 소환을 면했다. <금계필담> 저자인 전 의령현감 서유영도 '번거로움을 피하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이서구를 극찬했다. 억울하게 죽은 노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풍토였으니, 노비 몇을 연달아 죽인다 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얼마든 연쇄살인으로 볼 수 있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된 원인 중 하나는 법률제도에 있었다. 왕족이나 노비주인이 아랫사람을 죽이는 게 법적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권력이 그런 행위를 범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세자 같은 개혁적 인물도 아랫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국가권력이 범죄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 외에, 국가권력이 피해자의 복수를 막아줬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국가권력이 왕족이나 노비주인 편에 섰으므로, 피해자 유족들이 복수를 결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에 대한 연쇄살인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일부 왕족이나 노비주인들은 기분 내키면 아랫 사람들을 살해했다. 자기 행위가 불법으로 규정되지도 않고 보복 위험성도 극히 적었기 때문에, 별다른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권장된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들을 자꾸 죽이면 노동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권장될 리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가권력이 가해자 편에 섰으므로 가해자가 법적 단죄를 받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드물었다.
 
현대 범죄학계는 연쇄살인을 비교적 최근의 현상으로 인식하지만,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드라마 <나쁜 형사>를 보다 보면, '검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떻게 연쇄살인을 범할 수 있나?' 하는 분노감이 생길 수 있지만, 역사서 곳곳에는 검사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이 저지른 연쇄살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국가권력이 인정하는 범죄만 범죄로 인식하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 또 국가권력은 무조건 옳고 선하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서를 다시 살펴보게 되면, 연쇄살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쇄살인으로 인정될 만한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기록된 사건들을 수도 없이 접하게 될 것이다.
나쁜 형사 연쇄살인 주왕 사도세자 유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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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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