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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받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 재판받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재판받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 무위당 사람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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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은 투옥 3년여 만에 춘천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심한 옥살이였으나 정신적으로 버틴 탓인지 건강이 유지된 상태였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정치적으로 구속했던 일부 양심수들을 풀어준 것이다. 더 이상 가둬 둘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제사가 끝나면 제물(祭物)은 치워지기 마련이다. 
 
장일순이 옥중에 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누나 정순이 면회를 갔다가 동생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결국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알려주었다. 
 
집에서 모시고 살 때는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올리고 안방의 요강을 가져다 칙간에다 비우고 저녁이면 깨끗이 씻어서 다시 갖다 놓는 등 극진한 효자였다.  
 
어머니의 부음을 알게 된 장일순은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불효막심을 한탄하면서 뒤늦은 사죄의 편지를 썼다. 
 
1940년대에 찍은 가족사진, 장일순은 서울에 유학 가 있어 이 사진에는 없다.
▲ 장일순의 가족 사진 1940년대에 찍은 가족사진, 장일순은 서울에 유학 가 있어 이 사진에는 없다.
ⓒ 무위당 사람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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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영전에 올립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지난 6월 14일 누님이 면회를 오셔서 알려 주심으로 알았습니다. 어머님이 천당에 가시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습니다. 

어머니, 어찌 그렇게 가십니까! 
우리 남매는 면회장에서 한참 울었습니다. 대상까지 나가도록 모르고 있었으니!
 
어머님 살아계실 때 제가 걱정 끼친 일을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마음뿐입니다. 어머니 가시기 약 보름 전에 저에게 보내주신 간곡한 글월을 읽고 눈물집니다.
 
어머님이 가신 소식 듣고 그때부터 제 가슴에는 그늘이 졌습니다. 계시거니 할 때에는 든든하고 무엇 하나 걱정이 없더니, 정녕 가시었다는 말씀 듣고 적막해졌습니다.
 
옛 말씀에 "수욕정(樹欲靜)이나 풍부지(風不止)하고, 자욕양(子欲養)이나 친부대(親不待)라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려 하나 부모는 떠나고 계시지 않네)" 하옵더니, 계실 제 공경 못한 제가 설 땅을 잃었으니 이 한을 어찌합니까?    

어머니, 불효한 저를 그래도 웃음으로 받아주실 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허전합니다. 어머니, 참 무어라 말씀 올릴까요? 어머님을 위해서 연도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평화롭게 쉬시옵소서. 신공중(神工中)에 어머님을 대하겠습니다.
 
노경에 계신 아버님을 위해서 어머니, 천당에서 기구하여 주십시오. 쓸쓸하실 아버님을 생각하니 무어라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머님, 주님의 복 많이 입으시기 바랍니다.  

1963년 6월 19일
불효자 일순 올림.
(주석 1)

장일순은 육신은 풀려났으나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양심수들을 석방하면서도 규제의 끈을 풀어주지 않는다. 특히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혐의자들에게는 이른바 '보안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공직취임은 물론 해외여행이나 만나는 사람까지 일일이 신고하도록 하였다. 

박정희가 1975년 7월 16일 법률 제2769호로 사회안전법이란 것을 제정하며 출감자들을 더욱 옥죄었지만, 그 이전부터 사실상 각종 규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장일순은 옴짝달싹하기 어려웠다. 1955년 형제들과 봉산동에 손수 지었던 토담집 주위에는 경찰이 파출소를 지어 내왕자들을 일일이 체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찾고 싶어도 오지 못하게 감시체제를 만든 것이다. 경찰서가 멀지 않은데 굳이 파출소를 지은 것이다.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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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산을 쏟아 만들었던 대성학교는 그 사이 크게 쇄락해져 있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이 성의를 다하여 학교를 지켜냈지만 이사장이 부재하고, 더욱이 사상범으로 몰려 수감되면서, 이 학교는 관으로부터 각종 제약은 물론 일반의 기피 대상이 되고 있었다.
 
장일순은 학교의 재건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교육사업 뿐이라고 믿었다. 잃어버린 3년 세월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열과 성을 다하였다. 학교는 다시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쳤다. 아무리 포악한 정권이라도 사립학교 관리자를 억제할 수는 없었다. 

주석
1> 이용표 지음, 앞의 책, 93~9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위당 장일순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정희정권, #대성학교,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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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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