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2 09:36최종 업데이트 18.12.12 09:53
특유의 격정적 언어와 날카로운 통찰로 사랑받아온 목수정 작가의 연재 '목수정의 바스티유 광장'은 매월 첫째, 셋째 주 목요일 <오마이뉴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노란 조끼' 시위에 대한 긴급 리포트를 내보냅니다.[편집자말]
 

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노란조끼'(Gilets Jaunes)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이날 '노란조끼' 시위대는 파리, 마르세유 등 프랑스 곳곳에서 12만5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네 번째 대규모 집회를 열고 부유세 부활과 서민복지 추가대책 등을 요구했다. ⓒ 연합뉴스/AP



지난 한 달간 프랑스 전역을 격렬한 투쟁의 열기로 달구던 노란 조끼 시위대의 요구에 마침내 대통령 마크롱이 지난 10일 저녁 담화를 통해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루 종일 노조 대표들, 기업인 대표들과 만나 의견을 청취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마크롱은 가장 먼저 폭력성을 드러낸 시위대에게 더 이상의 관용은 없을 것임을 시사했다. 경찰이 잘못 조준한 최루탄에 맞아 자기 집에 있다 사망한 할머니에 대해서도, 경찰이 부당하게 무릎을 꿇리고 모욕을 준 151명의 고교생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시간부터 폭력을 쓰는 자에겐 본때를 보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협박으로 시작해 핑계로 끝난 담화
 

노란조끼 시위가 한달째 계속되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 나선 모습. ⓒ kbs 캡처


  
잘못을 일부 시인하기도 했다. "저의 적절하지 못한 말로 여러분 중 일부가 상처를 입은 점"과 "넉넉지 않은 연금으로 살아가는 은퇴자들의 사회보장 분담금을 인상한 것은 부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프랑스 시민들 다수가 드러내는 분노가 오로지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적어도 40년 동안 누적되어온 뿌리 깊은 불만들이 이제 폭발한 것이며, 그에 대한 자신의 몫의 책임을 지겠다면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 당장 내년 1월부터 최저임금 100유로(한화 약 12만 원)를 인상하겠다. (단, 이 인상분은 고용주가 아닌 국가가 전액 부담한다. 그러나 무슨 예산으로 이를 충당할 것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 월 2천유로(한화 약 257만 원) 이하의 연금을 받는 은퇴자에 한하여, 연초에 인상했던 사회보장분담금 인상분을 취소하겠다.
- 시간외 근무 수당에 대한 고용주의 세금 부담을 면제해 주겠다.
- 연말 보너스가 지급될 수 있도록 최대한 기업주를 독려할 것이며, 그 보너스에 대해 국가가 세금을 면제하겠다.
 

마크롱 집권과 함께 폐지한 부유세 부활에 대해서는 거부를 표했다. 이 부분은 가장 날카로운 대립 지점이었으며, 분노의 정점이었다. 마크롱은 대신 노란조끼의 요구사항 중 하나인 세금도피처에 숨겨진 부자들의 재산을 찾아내도록 애쓰겠다, 프랑스에서 장사중인 기업들이 프랑스에서 과세할 수 있게 하겠다는 미래형의 다짐을 내놓았다.

선거 때마다 제기된 기권표 집계 방법에 대해서도 전향적 검토를 약속했다. (마크롱과 르펜 중 하나를 골라야 했던 지난 대선에서 많은 이들은 "콜레라와 페스트 중에서 하나를 고르느니 백지를 내겠다"했고, 가장 많은 백지 투표가 나온 선거로 기록되기도 했다.)

당장 1월부터 실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최저임금 생활자, 은퇴자, 그리고 연말 보너스를 받을 형편이 되는 일부 봉급생활자들에 대한 약속이다. 부자들에게 더 과세하라는 조세정의 실천 요구에 대한 해답은 모호한 미래의 노력으로 미뤄두었다.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어진 성토
 

지난 주말 열린 노란조끼 시위에서 공화국 광장으로 향해 행진 중인 프랑스 시민들. ⓒ 목수정



담화 직후 언론 인터뷰에 응한 거의 모든 노란 조끼들은 대통령이 제시한 안에 만족할 수 없다거나, 그의 약속 이행 여부에 대해서 아직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각 정당의 정치인들도 이것으론 충분치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 대세를 이뤘다.

좌파정당 FI의 지도자 멜랑숑은 대통령 담화 직후 "마크롱은 시대를 착각하고 있다, 그는 국민들을 꾸짖는 걸로 시작했다"면서 실업자, 파트타임 노동자,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선 답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란 조끼의 투쟁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이 시민혁명은 위대할 것"이라고 평했다.

발레리 라보 사회당 의원도 "너무 뒤늦은 답변이며, 오늘 내놓은 제안들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며 의구심을 보였다. 집권정당인 LREM의 의원 사샤 울리에만이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SNS상에서는 누리꾼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동안 축소된 공공서비스는? 장애인들은? 병원은? 교원들은?", "우리가 원하는 건 100유로 올라간 최저임금이 아니야, 권력을 자본가들로부터 가져오는 거지!" 등의 반응이었다. 내년 5월에 있을 유럽의회 선거에 노란조끼들이 진출하여 권력을 빼앗아 오자는 제안들도 나오고, 노란조끼들이 출마하면 12% 정도 의회권력을 점할 수 있을 거라는 성급한 여론조사 결과도 등장하고 있다.

마크롱의 월요일 담화는 지난주부터 예고되어 있었고, 그의 발표 내용과 상관없이 5번째 시위가 이번 주 토요일 프랑스 전역에 이미 예고된 바 있다. 대부분의 노란조끼들은 그의 말 내용에 대해 일찌감치 별 기대가 없다는 입장들을 취하고 있었고, 그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마크롱은 끝내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빵 부스러기 던져주며 달래보려던 그의 작전은 금세 들키고 말았다.
  
지난 8일 집회 때, 파리 도심에는 2차 대전 이후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장갑차 12대가 모습을 드러내며 긴장을 자아냈다. <마리안느>(Marianne)에 따르면, 그 장갑차에는 일순간 광장의 모든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액체 무기가 장착되어 있다. 다행히도 그날 정부는 이 무기를 시민들을 향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월요일 저녁 마크롱의 '대국민 협박'은 이 무기를 다음부터 쓸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지난 12월 8일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란조끼 시위 현장. ⓒ 연합뉴스/EPA



 

지난 주말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 현장에 등장한 장갑차. 파리 도심에 장갑차가 등장한 건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이다. ⓒ 목수정


  
"모든 걸 얻기 전까진 싸움을 멈출 수 없다"

한편 대학생들에 이어 전국 대학 총장들까지 정부에 내년 비유럽권 학생들에 대한 등록금 대폭 인상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요구중이다.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파리 근교 고교생들을 굴욕적으로 무릎 꿇린 장면은 동영상으로 전국에 전파돼 고교생들의 분노를 잔뜩 부추긴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전국의 변호사들은 정부의 법제개혁(검사 권력 강화와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통합을 골자로 함)에 반대하며 파업을 예고했다. 프랑스 최대 노조 CGT의 철도와 파리교통공사 노조는 그들대로 오는 금요일 파업을 예고했다. 좌우전후를 살펴보아도, 마크롱의 일방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시민들과 공권력 간의 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전 유럽인들을 향해, 새로운 유럽 건설을 위한 조세정의 실현의 대안을 서명운동이란 형식으로 지난 10일에 제시하기도 했다. 마크롱이 가장 소극적으로 답한 바로 그 부분이다. 부자들과 대기업들에게 GDP 4% 선의 의무 과세를 부과해 유럽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훼손된 공공부분을 다시 건설하자는 제안이다.

한줌의 자본가가 독점해온 권력과 부는 유럽전체를 파괴하고 자해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극소수가 절대다수의 부를 점하며 빚어내는 지구 전체의 불의, 이 폭력적인 불평등은 어떤 방식으로든 깨져야 한다고 사방에서 외치고 있다. 그것이 노란조끼의 방식이든, 피케티의 방식이든, CGT의 방식이든.     
                                     
토요일 집회장에서 만난 한 청년 노란 조끼는 이렇게 외쳤다.

"경찰한테 얻어맞는 것도, 매콤한 최루탄도 두렵지 않아요. 금방 익숙해지죠.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건,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정치인들이에요. 그들은 시민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한번 권력을 얻으면 더 이상 우리말을 듣지 않죠. 더 튼튼한 공공서비스, 생존하는 게 아니라 누리는 삶, 평등, 이 모든 걸 다 얻기 전까진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어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