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수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다수자 위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도 쉽죠. 특히 성소수자는 인류 역사 내내 존재했지만, 대부분 사회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거나 '악행의 근원'으로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주인공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밤에는 가수로,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일하죠. 마리나에게는 나이는 많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레예스)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 오를란도가 갑작스러운 심장 질환 증세를 보이며 쓰러지고, 마리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를 떠나보냅니다. 경찰은 마리나에게 오를란도의 사망 경위를 캐묻고, 오를란도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마리나를 미워하고 무시합니다.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이끄는 영화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스틸컷. 마리나(다니엘라 베가)와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레예스)는 행복한 연인이다.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스틸컷. 마리나(다니엘라 베가)와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레예스)는 행복한 연인이다. ⓒ 아이 엠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배역 중 하나로 등장하는 영화는 1970~1980년대에도,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비중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대부분 우스꽝스럽고 막연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설정되거나, 잘해봐야 주인공의 조력자로 감초 역할을 할 뿐이었죠. 트랜스젠더 주인공을 내세워 그들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변방에만 머물렀고, 최근에 들어서야 무대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칠레 영화 <판타스틱 우먼>(2017)은 그런 흐름에 정점을 찍은 영화입니다. 작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올해 초에는 보수적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세계 영화인들의 박수를 받았죠.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은 자칫 신파로 흐를 수도 있었던 마리나의 수난극을 절제된 톤으로 묘사하면서 더 내밀하고 진한 감정을 포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실제 상황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교차시키면서,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마리나의 감정을 관객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주연을 맡은 배우 다니엘라 베가는 실제 트랜스젠더로서, 감독의 각본 작업에 조언을 해주는 역할로 합류했다가 주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다니엘라 베가는 배우 경력도 있는 만큼 이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트랜스젠더로서 받는 차별과 멸시에 대한 반응, 혼자 있을 때의 섬세한 감정 표현 같은 것들이 자연스러워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소수자를 다룬 영화는 왜 필요할까
 
 <판타스틱 우먼>의 스틸컷.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오를란도(안토니오 레예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박대당한다.

<판타스틱 우먼>의 스틸컷.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오를란도(안토니오 레예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박대당한다. ⓒ 아이 엠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평범한 사람보다는 특이한 상황에 놓인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야 이른 시간 안에 관객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그것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니까요. 사회적 소수자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자주 만들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소수자가 아닌데, 왜 이런 영화를 봐야 해?'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자기는 빈민가에 사는 실업자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성 소수자도 아닌데 굳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필요가 없다는 식이죠.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입니다. 인간의 삶은 아주 다양한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더라도 성 소수자일 수 있으며, 사회 전체로 보면 중산층 이성애자 남성에 속하는 사람도 자기 직장 내에서는 소수파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난은 형태는 다를지라도 비슷한 아픔으로 남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의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관객은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순간의 감정을 떠올리고 그때의 막막함을 떠올리면서 소수자의 감정에 깊이 이입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생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느낌은 언제든 관객에게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를 주죠. 무엇보다 이런 '역지사지'의 과정은 많은 사람이 그동안 무신경했거나 잘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을 되새기게 하면서, 소수자를 차별하는 문화를 바꿔 나가는 중요한 동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평탄하게 아무 일 없이 잘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굳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비현실적인 금수저들의 이야기는 결코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기 힘듭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거나 확실하게 승리하는 영웅도 그에 합당한 고난을 겪고 이겨내는 과정을 거칠 때에만 관객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니까요. 마리나의 작은 성공, 소소한 평온함이 담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매년 11월 20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TDoR)입니다. 혐오 범죄로 목숨을 잃은 트랜스젠더들을 추모하는 날로, 1998년 살해당한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 헤스터를 기리면서 시작됐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날을 맞아 <판타스틱 우먼>을 관람해보면 어떨까요?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일도 나와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포스터

영화 <판타스틱 우먼>의 포스터 ⓒ 아이 엠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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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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