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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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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날이다.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출생했다. 이날은 음력 정사년 9월 30일이다.

박정희가 태어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치학자 전인권이 쓴 <박정희 평전>에 따르면, 어머니 백남의가 최소 6~7가지 방법을 동원해 태중의 그를 지우려 했다고 한다.
 
"간장을 한 사발씩 마시기도 했고 밀기울(밀 찌꺼기)을 끓여서 마시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이나 장작더미 같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했으며,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 버들강아지 뿌리를 달여 마시기도 했으며, 이런저런 방법이 다 실패하자  '아이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둘둘 말아 아궁이에 던져버려야지'라는 결심을 한 후 아이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제1장.
 
백남의가 그런 시도를 했던 표면적 동기는 1872년생인 그가 당시 45세였던 데다가, 장녀 박귀희까지 임신 중이었기 때문인 듯하다고 전인권은 말한다.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박정희는 이후 일본군 장교가 됐지만, 일제 패망 뒤에는 국군에서 승승장구했다. 1948년 여순사건(국군 14연대의 제주4·3항쟁 진압 거부) 때 남로당에 연루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형까지 선고받았지만,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되더니 얼마 안 있어 형 집행 면제를 받았다. 그 뒤 박정희는 승승장구했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가 죽은 지 39년이나 지났다. 그가 세운 유신체제도 오래전에 붕괴됐다. 그의 계승자도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상당수 사람들로부터 존경, 아니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죽어서도, 완전히 죽지 않은 것이다. 박근혜 탄핵으로 그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실추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흠모를 받고 있다. 태극기 집회와 무관한 사람들 중에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를 '숭배'하는 듯한 이들은 박정희 독재정치가 끼친 해악이나 인권 침해에 대해 설명해도, 과보다는 공을 앞세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로 정권과 재벌만 배를 불렀으며 서민들은 떡고물밖에 못 챙겼다'고 비판해도, '박 대통령이 아니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겠어?'라는 답이 돌아온다. '당신이 했으면 더 잘했겠어?"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웬만한 사람들보다 어렵게 사는 이들도 그들 속에 적지 않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 덕분에 잘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이 일부 기독교 보수세력과 박정희의 연관성이다. 박정희 숭배자들의 내면세계에서 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는 신앙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 강조한 보수 기독교
 
일본 육사 졸업 뒤의 박정희.
 일본 육사 졸업 뒤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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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는 지난 세기에 엄청난 교세 확장을 이뤘다. 초기 신자와 목회자들의 헌신적 희생이나 서양 선교사들의 노력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또 다른 요인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50년 한국전쟁(6.25 전쟁) 발발 이후로 대중심리에서 나타난 변화가 기독교 성장의 발판이 됐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전쟁은 남한 대중에게 반공이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정권이 그 이념을 주입한 측면도 컸지만, 대중이 겪은 경험이 이념을 증폭시킨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전쟁으로 가족·재산·직장·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으니, 북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남한 대중 사이에 확산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전도를 하자면 당연히 대중 심리를 감안할 수밖에 없다. 일부 보수적 목회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적극 활용했다. 기독교 교리와 별로 관계없는 반공 이념에 전도에 이용했던 것이다.

대중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공산당에 대한 적대심을 강조하기도 하고, 반공주의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이런 목회자들이 진보적 목회자들을 내몰고 교계 분위기를 주도했다. 양편승 선문대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이 신종교 현상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소수의 개신교 사회주의자들이 월북하거나 폭력적으로 제거되거나 공개적으로 전향하면서, 남한의 개신교는 공격적인 반공주의자들의 집결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개신교의 신념 체계가 사탄론(악마론)과 종말론, 선민의식과 결합되면서, 반공 담론 자체가 구원론의 일부로 발전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한국신종교학회가 2011년 발행한 <신종교연구> 제25집에 실린 논문.
 
기독교 보수세력 내에 반공 이념이 확산된 데는 월남 기독교인들의 역할도 컸다. 해방 직후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 밀려 38도선을 넘은 조선민주당 및 기독교자유당 간부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민주당도 기독교인이 다수를 이룬 정당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보수세력 내에서 반공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반공 이념을 매개로 남한 교계에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고영은 영남신학대 교수의 논문 '한국교회 반공 이데올로기 형성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월남한 북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남한 내에서 강력한 반공주의 의식을 가진 정당을 창당하거나 각종 청년 단체를 구성하였다. (한국전쟁 뒤에) 이들은 선교사들과의 유대관계를 통해서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을 독점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한국실천신학회가 2016년 발행한 <신학과 실천> 제52권에 수록.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 반공세력은 교계 내부뿐 아니라 외부로도 영향력을 팽창했다. 정치권력과도 자연스레 연결됐다. 반공을 표방하는 정권이 지배하던 시절이므로, 당연한 결과다. 이 세력은 이승만 정권보다 박정희 정권과 훨씬 강하게 유착됐다.
 
"이들은 정치적·반공적·이데올로기적 무장을 통해 이승만 정권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승만 정권과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반공을 기치로 내건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각종 정부 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협력관계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보수 반공 이데올로기 확산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고영은 논문.
 
박정희가 반공정책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일부 교회는 반공을 교리처럼 가르쳤다. 이것이 기독교 보수세력 내에서 박정희가 구세주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이렇게 형성된 분위기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다.

'반공 구세주'에 부합했던 인물, 박정희
 
5·16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오른쪽 선글라스).
 5·16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오른쪽 선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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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보수세력과 박정희의 인연이 질긴 이유가 있다. 반공을 외치는 보수세력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만큼 비교적 무결한 '반공 구세주'를 찾기 어렵기 때문 아닐까. 한국 현대사를 둘러봐도, 박정희만처럼 '반공 구세주' 자격을 갖춘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남로당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의 행적만 보면 역대 대통령 중에서 박정희만큼 반공 이념에 잘 부합하는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도 반공을 추구했지만, 그는 1960년 4.19 혁명으로 국민적 단죄를 받았다. 한국을 몰래 빠져나가 하와이로 도망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보수적 목회자가 아무리 열렬히 설교한다 해도, 이런 인물을 반공의 구세주로 내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이승만을 존경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국민 대부분이 공감하는 4.19 이념에 의해 이승만이 배척을 당했으니, 그에 대한 숭앙의 분위기를 대중한테 확산시키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따른다.

전두환도 반공을 추구했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이승만·박정희에 못 미친다. 거기다가 그 역시 1987년 6월항쟁으로 국민들의 경고를 받았다. 퇴임 뒤에는 사형 구형을 받았다가 무기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이렇기 때문에 그 역시 반공의 구세자가 되기에는 한참 자격 미달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다르다. 민주화세력의 저항을 받고 국제적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이승만·전두환처럼 살아생전에 정치적 격하를 당하지는 않았다. 부하 김재규의 총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최후의 망신을 당하지 않고 국장이 치러졌다는 점에서, 그는 '반공의 구세주로 추앙받을 자격'을 지킬 수 있었다. 이승만·전두환과 달리 박정희가 아직까지 기독교 보수세력의 추앙을 받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가 박정희 시대를 상당 부분 청산했는데도 사회 일각에서 여전히 그를 숭앙하는 것은, 기독교 보수세력 안에 박정희를 구세주처럼 모시는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금력과 조직력까지 튼튼한 기독교 내부에서 박정희 숭앙을 조장하는 일부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39년째 유지되는 원동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태그:#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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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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