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작품 포스터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작품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룻거 하우어(로이 배티 역)가 빛이 나는 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해리슨 포드(릭 데커드 역)를 끌어올릴 때다. 포드는 건물 끝자락에 매달린다. 옆 건물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하우어는 '레플리칸트'(복제인간)답게 건물 사이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이전까지는 추격 장면이었기에 우리는 그가 포드를 끝장내리라 예견한다. 그러나 하우어는 포드를 그저 내려다본다. 아래쪽의 포드도 그런 하우어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바로 전 추격장면에서 손바닥에 철근이 박혔던 그의 육신은 이제 날개를 달았다.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사명도 완수되었다. 이제 하우어는 포드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허심탄회한 삶을 돌아본다. "모든 순간들은 빗 속에 눈물처럼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이제 죽을 시간이야"라는 명대사를 마치고 그의 생명은 꺼지고야 만다. 처음부터 예견된 죽음의 순간이었지만 바로 이 장소와 시간이라는 점은 특별하다. 

아래에서 위로의 구원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은 2019년이다. 2019년을 약 두 달 여 앞두고 영화를 다시 보니, 이 영화가 그린 2019년은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달라 보인다. <블레이드 러너> 속 2019년은 핵 전쟁이 끝난 뒤 혼돈에 빠진 세상이다. 지구에 잠입한 복제인간들을 색출하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직업도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2019년을 앞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평등'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설정 쇼트로 제시되는 도심의 풍경은 위에서 아래로의 피라미드 구조, 수직적 계급을 강조한다. 복제인간들은 인간의 사회에서 피지배 계층이다. 그렇기에 복제인간인 로이 배티가 지배계층인 릭 데커드를 '끌어 올려준다'는 점은 더욱 인상적이다. 엄밀하게 말해 포드도 하급 경찰에 속할 뿐이니 피라미드의 상층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영화의 대립 구도는 포드와 하우어이다. 그래서 이분법으로 나누면 포드는 상층 하우어는 하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계급적인 평등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영화의 물음은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인간으로서 긴 수명을 지닌 포드는 인간을 복제한 '짧은 수명'의 레플리칸트를 관찰할 기회가 있다. 그들은 애초에 짧은 수명이었기에 자신들의 창조주를 찾아가는데, 창조주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때 그들은 반란의 목표,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하우어는 단순히 상층 계급,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복제인간)이 그들의 창조주를 죽임으로써 그 자리를 탈취하고, 창조주의 권한으로 만인을 평등하게 해야만 비로소 끝이 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하우어가 창조주를 죽인 시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피조물들의 반란이라는 스토리는 영화 내에서 끝이 나고, 이제는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생물학적으로 분류된 그들의 계급은 죽음 앞에서 아무 소용 없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무언가 전파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인간이냐 복제 인간이냐'라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다. 

사랑할 수 없다는 두려움

만인의 고통을 짊어지고 이 땅을 떠난 신을 떠오르게 하는 하우어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신과는 달리 그가 부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레플리칸트의 기억이 복제될 수 있다고 암시하지만, 하우어에 신을 대입할 때 그의 기억은 복제되어서는 안 된다. 신은 단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우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전파하는 것, 영화 속 세계관에 자신과 같은 자애로움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육체와 기억은 복제될 수 있는 '레플리칸트'와 육체와 기억이 복제되지 말아야 할 '신'이라는 두 단어가 충돌한다. 

하우어는 죽음과 사랑에 대한 의문을 품고 살아간다. 인간이 되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하우어는 이미 인간의 자질을 모두 갖고 있다. 그는 사랑할 줄도 알고 생각할 줄도 알며 자비를 베풀 수도 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명확하게 인식한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다.

하우어가 포드를 구한 데는 그러한 고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끝자락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회개하는 장면은 여러 예술 작품에서 흔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하우어의 회개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레플리칸트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타이머와도 같다. 

신 죽이기를 통해 신의 자리에 올라선 하우어는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이 죽여야 할 신이 아직 남았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다. 창조주를 죽이고 나서 신의 자리에 등극한 그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포드를 '구원'하려 했다. 그러나 포드는 직업적인 사명으로 하우어와의 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우어는 그를 인간으로 올라서게 하려 죽음의 공포를 심어준다.

마침내 그 결실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우어의 시선에 담기게 된다. 포드는 '비인간' 레플리칸트가 아니라 '중력'이라는 아주 단순한 것에서 죽음을 느낀다. 이에 하우어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매만지고, 신의 자리를 넘겨준다. 이제 옛 신은 이전의 신(창조주)처럼 죽고, 새 신이 된 포드는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후속편에서 포드는 다시금 신의 자리를 라이언 고슬링에게 물려준다.)

죽음이라는 공통점이 이 계보의 주축을 이룬다. 하우어와 포드는 그들이 식민지로 넓힌 우주 전체로 보면 '어떤' 죽음에 불과하다. 수명이 4년이든 80년이든 간에 그들의 결론이 죽음으로 귀결됨은 확실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스꽝스럽게도 포드는 자신이 인간임을 알기에 죽음이 아직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우어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계급'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계급을 뒤엎는 것, 그 행동력의 이전에는 죽음에 대한 자각이 필요했다. 이 레플리칸트는 자신의 죽음이 이미 '예견'되었기에 '인간'이 된다. 하우어보다 수십 배의 수명을 가진 포드가 지금 이곳에서 죽음을 맞닥트렸기에 당황했다면, 하우어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행동했기에 포드보다 '인간'적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영화 블레이드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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