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3집

김현식 3집 ⓒ 동아기획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그의 노랫말처럼, 한국인은 비가 오면 그의 음악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영원한 '사랑의 가객' 고 김현식 이야기다. 그의 목소리는 특별했다. 순수한 소년의 미성과 상처투성이의 거친 목소리를 오갔다. 파워풀한 가창을 보여줄 때가 많았지만 그 속에 여림을 품고 있었다. 듣는 이의 심장에 곧바로 침투하는 목소리였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들끓어 올라온 그의 울림은 '예쁘장한' 당시 주류 음악계를 용암처럼 덮쳤다.

김현식이 남긴 숱한 명곡들은 아직도 한국 음악계를 감싸고 돈다. 앞서 말한 '비처럼 음악처럼'과 '사랑했어요', '내사랑 내곁에'와 같은 애절한 발라드들이 첫 자리에 놓인다. 때로는 '그대와 단둘이서', '가리워진 길'처럼 달콤한 곡으로 사람들을 녹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블루스와 록에서 찾았다. <복면가왕>의 하현우도 애를 먹었다는 처절한 '넋두리', 신촌블루스와 어깨 걸고 부른 '골목길'과 '환상'... 그것은 분명 김현식의 또다른, 그러나 가장 또렷한 얼굴이었다.

다른 음악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직접적인 접점이 있는 이들만 세워봐도 봄여름가을겨울, 유재하, 빛과소금, 신촌블루스, 강인원 등 '전설들의 명단'이 된다. 그들과 함께 빛나는 곡을 쏟아내며 1980년대를 풍미했던 가객은 그러나 서른셋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간경화로 투병하던 중에도 병원을 탈출해 곡을 녹음했고, 생일을 맞은 동료 환자를 위해 거친 목소리로 소규모 라이브를 열었다. 마지막까지 온 생애를 음악에 던진 김현식은 그렇게 영원히 우리의 곁에 남았다.

오늘은 그의 28주기다. 떠나간 목소리를 다시 그리며 그가 남긴 명곡들을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소개하고 싶은 수많은 곡을 애써 추려내다 보니 어쩌다 '유명한 곡 리스트'가 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이 노래들이라면 그의 삶을 최대한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 싶은 곡들로 추려보았다. 

한평생 비처럼, 음악처럼 살았던 가객 김현식. 가을을 살다 간 그의 음악에 젖어보자.
 
 김현식

김현식 ⓒ 동아기획

  
1. 봄여름가을겨울 (1980, 1집 <김현식 새노래> 수록)
1980년 여름, 음악다방과 밤무대를 돌던 무명가수 김현식은 세상 앞에 야심찬 출사표를 던진다. 비록 한 방향으로 정리되지는 못했지만, 첫 앨범답게 패기와 가능성을 마음껏 뽐낸다. 그중에서 대표곡을 꼽으라면 역시 이 노래다. 몸을 가만히 둘 수 없는 펑크와 소울의 '흥'이 폭발하고, 매력적인 멜로디와 친근한 가사가 귀에 쏙쏙 박힌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투박한 구석이 있는 초기 김현식의 미성도 일품이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과 쌍벽을 이루는 영원한 '땅의 노래!' 제목 '봄여름가을겨울'은 이후 그의 백밴드 이름이 되고, 더 훗날엔 또다른 굵직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2.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1984, 2집 <김현식 2> 수록)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을 시작한 김현식은 블루스를 자신의 음악적 고향으로 삼았다. 같은 지향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소속된 당대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레이블 동아기획으로 적을 옮기고, 완연한 블루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를 두 번째 앨범에 실었다. 가객 김현식의 '뿌리'를 느끼고 싶다면 놓쳐서는 안 될 초창기 명곡! 노래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흥겨운 기타 반주를 들려준 사랑과 평화 최이철의 맛깔나는 블루스 기타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3. 사랑했어요 (1984, 2집 <김현식 2> 수록)
'사랑했어요'는 비장하고도 애절한 선율과 김현식의 처절한 보컬이 빛난 명곡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그것은 '수려하지만 다소 진부'하다는 뜻이나 다름없을 테다. '사랑했어요'는 물론 기존 발라드 문법에 비춰봐도 잘 만든 작품이지만, 곡을 정말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발라드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타격이다. 악기들은 은근하게 으르렁대고, 그 위로 울려퍼지는 보컬은 뜨겁게 가련하다. 쓸쓸한 체념 속에 터질 듯한 격정을 꾹꾹 눌러담는 절창(絕唱). 그리 강하지 않은 노랫말임에도 도저한 호소력이 느껴지는 이유다.

4. 비처럼 음악처럼 (1986, 3집 <김현식 3> 수록)
처음부터 끝까지 반짝이고, 포근하고, 벅차도록 아름답다. 유리구슬처럼 청아한 피아노 도입부와 이어지는 첫 소절부터 듣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한층 더 성숙해진 김현식의 보컬은 그야말로 절륜하고, 새로 꾸린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풍성하고도 섬세한 연주가 곡을 보석처럼 빛낸다. 건반 박성식의 세련된 송라이팅부터 김종진의 멋들어진 재즈 톤 기타까지 한 구석도 빼놓을 게 없다. 천재 뮤지션의 '절정기'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불후의 명곡! 이 곡의 인기에 힘입어 앨범은 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성공을 거둔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좌측부터 박성식, 장기호, 김현식, 김종진, 전태관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좌측부터 박성식, 장기호, 김현식, 김종진, 전태관 ⓒ 동아기획

  
5. 그대와 단둘이서 (1986, 3집 <김현식 3> 수록)
거칠어 보이는 김현식에게도 이런 귀여운 면이 있다니! 알콩달콩한 연애 초기의 감정을 그대로 옮겨 온 편곡 위에 다소 탁한 목소리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언더'에서 올라온 김현식을 오늘날 모든 대중이 가까이 두고 추억하는 이유는, 이 노래처럼 편하고 예쁜 곡도 기꺼이 부를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1980년대 음악 특유의 낙관적 분위기가 언제나 산뜻하게 다가오는 곡. 작곡은 후일 박성식과 빛과소금을 결성하게 되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베이시스트 장기호다.

6. 언제나 그대 내곁에 (1988, 4집 <김현식 4> 수록)
3집으로 대중적 성공을 얻었지만, 행복은 짧았다. 1987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를 잊지 않았다. 3개월의 형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골든디스크 본상을 받았고, 심기일전하여 발표한 복귀작도 성공을 거뒀다. 고마웠던 걸까 외로웠던 걸까. 앨범의 타이틀곡은 연가가 아니라,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힐링 송'이었다. 느린 템포로 천천히 감성을 감싸오는 분위기가 퍽 따뜻하다. 어두웠던 시대의 수많은 밤들을 부드럽게 토닥여준 노래.

7. 그대 내품에 (1988, 4집 <김현식 4> 수록)
87년 11월의 첫날 김현식은 유재하의 부고를 듣는다. 그에게 유재하는 아끼는 후배이자 한때 봄여름가을겨울에서 동고동락한 동료였다. 3집에도 유재하가 준 곡을 담을 만큼 애정이 깊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떠난 뒤 부른 '그대 내 품에'는 더욱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티없이 맑은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한 유재하와, 처연한 목소리로 먼저 떠난 동생을 그리는 김현식의 대비가 애달프다. 아픔을 잊기 위한 폭음으로 가객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다. 유재하가 떠나고 3년 뒤 90년 김현식도 그를 따른다. 11월 1일, 얄궂게도 같은 날이었다. 
 
 신촌블루스 2집

신촌블루스 2집 ⓒ 동아기획

  
8. 골목길 (1989, 신촌블루스 2집 수록)
엄인호가 이끄는 신촌블루스는 당시 언더그라운드 블루스의 가장 중요한 '크루'였다. 한영애, 강허달림, 이은미 등은 물론 정경화도 거쳐 갔다. '당연히' 김현식도 빠질 수 없었다. '환상', '바람인가/빗속에서' 등에서 끈적하고 호방한 보컬을 들려주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곡은 '골목길'이다. 1982년 아이돌 가수 윤미선이 먼저 불렀으나 히트하지 못하던 것을 김현식이 그야말로 '확실하게' 살렸다. 레게처럼 깔짝이는 기타 반주와 "골목길 접어 들 때에~"로 시작하는 괄괄한 보컬은 이제 하나의 시그니처 아닐까?

9. 비오는 날 수채화 (1989, <비오는 날 수채화 1 OST> 수록)
가끔 영화보다 OST가 유명한 경우가 있다.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의 '비오는 날 수채화'도 그렇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구성과 아름다운 멜로디가 빛난 명곡이다. 그러나 이 곡의 또 다른, 그리고 매우 중요한 매력 포인트는 바로 김현식이다. 상대적으로 깔끔한 두 보컬과 걸걸한 김현식의 화음이 곡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동화 같은 노랫말까지 높은 인기를 끌었고 노래는 1990년 골든디스크 본상까지 받게 된다. 동명의 영화도 황금촬영상을 탔으니 그리 불공평하진 않겠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비오는 날 수채화'는 노래로 남았다.

10. 이별의 종착역 (1990, 신촌블루스 3집 수록)
김현식의 '블루스 소울'을 가장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신촌블루스 3집에 수록된 곡으로, 간드러지는 엄인호의 기타가 농염하다. 김현식 보컬의 '농도'도 전에 없이 깊다. 그야말로 끈적함의 대향연! 그런데도 신기하게 부담스럽지가 않다. 손시향의 원곡에 기반해 친숙한 멜로디 덕이겠지만, 시대를 타지 않는 김현식의 훌륭한 가창 덕이기도 하다.
 
 김현식

김현식 ⓒ 동아기획

 

11. 넋두리 (1990, 5집 <김현식 5> 수록)
술과 담배로 시름을 달래는 세월이 길어지고, 김현식의 건강도 계속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객이 음악을 놓을 수는 없었다.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던 중에도 그는 앨범을 녹음한다. 그렇게 완성한 '넋두리'는 한 편의 비극이다. 불길하게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운명을 재촉하고, 기타 명인 박청귀가 처연하게 현을 뜯는다. 그 위로 김현식은 성대를 찢으며 "갈 테면 가라지" 울부짖는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이토록 처절한 포효는 없다. 이 앨범을 내고 얼마 뒤, 한 시절을 풍미한 가객은 서른셋의 짧은 삶을 마친다. 그날도 꼭 오늘처럼 추웠으리라.

12. 내사랑 내곁에 (1991, 6집 <김현식 6> 수록)
김현식의 죽음 이후 발매된 6집에 수록되어 세상에 나온 '내사랑 내곁에'는 ​​​'비처럼 음악처럼'과 함께 김현식을 상징하는 대표곡이다. 갈라진 목소리와 쓸쓸한 노랫말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선율과 귀에 친숙한 진행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 곡을 완성한 가장 큰공은 역시 '마른 나무'같은 김현식의 처절한 보컬이다. 실연의 상처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만 같은 목소리지만, 감정이 과잉되었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김현식이라서다. 그는 그런 가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대중음악웹진 이즘(www.izm.co.kr)과 채널예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현식 음악 노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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