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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잠을 설쳤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26일 오전 7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앰프와 마이크, 악기 등을 차 트렁크에 주섬주섬 싣고 길을 나선다. 경남 창원(마산)에 노랠 부르러 가는 길이다.

광주의 젊은 교사들이 경남 교육청의 초대를 받았다. 경남의 교사들 앞에서 한 시간 동안 민주와 평화, 인권감수성을 주제로 노래 공연을 할 참이다. 지난 2012년 어느 날, 대학 시절 노래패 활동을 함께했던 이들이 교사가 된 후 다시 모여 정기적으로 공연을 해온 터다.
 
노래로 민주, 평화, 인권을 담아낸 뭉클한 시간이었다.
▲ 광주 젊은 교사들의 노래 공연 모습 노래로 민주, 평화, 인권을 담아낸 뭉클한 시간이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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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민중가요는 대학 캠퍼스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익숙한 노래였지만, 이젠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거의 없는 흘러간 옛 노래가 돼버렸다. 웬만한 단과대마다 한두 개쯤 있었던 노래패도 이젠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내로라는 민중가요 그룹이었던 '노찾사'나 '꽃다지', '천지인' 등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는 대학생이 적지 않다.

선배 교사로서, 민중가요의 노랫말을 죽비 삼아 교단에 서는 젊은 교사들이 대견할 따름이다. 그들과 대학 선후배 사이도 아닌데다 띠 동갑도 넘는 나이 차이에도, 함께 근무한다는 이유로 그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 행복하다. 대학 시절 배운 어쭙잖은 기타 실력으로 그들의 노래를 반주할 뿐이지만, 노래로 젊은 교사들과 소통하는 건 늘 가슴 설레는 일이다.

광주와 경남 교육청과의 인연은 지난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광역시교육청과 5.18 기념재단이 주최한 전국 교사 대상 5.18 연수에 경남 교육청 소속 장학사와 교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전국화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5.18 연수의 마지막 꼭지가 '노래로 부르는 민주주의'였다.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의 반응이 괜찮았던지, 경남에서도 자체적으로 특수 분야 직무연수를 기획한 모양이다. 연수의 일정도, 내용도, 참여 교사도 달랐지만, 주제만큼은 광주에서의 그것과 동일했다. 민주와 인권, 평화의 정신은 5.18 광주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3.15 의거가 30년 뒤 5.18 정신으로 계승된 것이라 해야 옳다.

60주기를 앞둔 오래 전 일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960년의 마산의 봄은 1980년의 광주의 그것만큼이나 뜨거웠다. 자유당 일당독재의 연장을 획책하던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를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전국적으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중심에 '3.15 마산'이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대의 맨 앞에 섰고, 시민들은 열혈 청년들의 올곧은 외침에 호응했다. 시위대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고, 이내 총칼을 앞세운 경찰에 의해 무자비한 진압이 자행됐다. 전라도 남원 출신 고1 학생 김주열은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고, 경찰은 그의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놀랍게도, 이를 주도했던 자는 노덕술과 함께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였던, 당시 마산경찰서 경비과장 박종표였다. 이듬해 터진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철저히 억눌렸지만, 친일 청산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 계기였다. 이렇듯 3.15 의거는 '정신분석학의 영역'이라고 조롱받던 우리나라 현대사에 숨통을 틔워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과연 경남 선생님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일어서서 함께 부를 수 있을까요?"

마산이 처음이라는 노래모임의 한 젊은 교사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자발적으로 연수에 참여한 교사라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거라는 답변에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른바 지역감정에 비교적 자유로운 젊은 교사조차도 해묵은 '정서적 거리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늘 공연의 마지막 꼭지였다. 세부 주제가 무엇이든 적어도 민중가요 공연이라면, '기-승-전-임을 위한 행진곡'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5.18 기념식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단언했듯,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5월 영령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이며 5.18 정신 그 자체다.

5.18이 3.15 의거를 계승한 민주주의의 외침이라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3.15 의거를 기리는 헌사이기도 하다. 5.18과 3.15가 별개일 수 없듯이, 두 사건을 관통하는 민주와 인권, 평화의 정신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통해 이어진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한 그 어떤 강의도 1분 30초짜리 이 노래 한 곡에 담긴 메시지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인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우리를 초대한 경남 교육청 장학사는 악수 대신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와는 딱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어색하기는커녕 고향의 십년지기 선배 마냥 살가웠다.

공연장이 될 작은 세미나실은 공부하는 교사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3.15 의거를 민주시민교육 수업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연수 이틀째 마지막 꼭지인 공연을 앞두고, 그들의 눈빛에선 지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공연에 대한 부담을 주기보다 그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게 했다.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선 그 이름, 청년 학생.' 이번 공연을 준비하며 우리끼리 정한 나름의 소주제다. 교사 대상 연수라는 점에 착안하여, 3.15와 5.18의 주역인 청년 학생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역사의 주인으로 올곧게 자라나기를 바라는 염원과, 교사로서 '푸르른 삶을 배우고 하루하루 실천하자'는 다짐을 두루 담고자 했다.

민중가요 그룹 '아름다운 청년'의 수록곡인 '푸른 나이, 청년'으로 공연을 시작한 이유다. 이어서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를 함께 부르며 뜨거웠던 1960년 봄을 떠올렸다. 안치환의 '잠들지 않는 남도'를 소개하며 올해로 70주기를 맞은 제주 4.3 항쟁을 기리는 꼭지도 부러 마련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걸 배경 영상에 함께 담았다.

3.15 의거로부터 시작해 5.18과 6월 민주항쟁을 거쳐 '촛불혁명'에 이르는 민주화의 벅찬 여정을 노래에 다 담아내기에 한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핏빛 5월을 상징하는 '오월의 노래'와, 영화 <1987>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6월 민주항쟁의 상징곡이 된 '그날이 오면'은 주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서정적인 노랫말에 담아낸 불후의 명곡들이다.

공연을 준비하며 민주주의의 외침이 평화와 통일에 닿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모으고자 곡을 선정하고 얼개를 짰다. 민주주의가 전반부의 주제라면, 후반부는 평화와 통일을 노래했다. 줄곧 평창 동계올림픽과 연이은 남북정상회담,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두 손 맞잡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가슴 벅찬 사진을 배경 삼은 건 그래서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노무현을 세웠다. 지역패권주의에 온몸으로 맞서 정치 개혁을 꿈꾼 '구시대의 막내를 자처한 바보 정치인', 그보다 제격인 인물은 찾을 수 없었다. 찬란한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에서 그의 지분은 적지 않다. 하물며 그의 고향인 이곳 경남에서 그의 위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른바 '노풍'의 진원지로서 그를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곳이 광주라지만, 외려 광주가 그에 빚진 게 더 많다. 일례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5.18 기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치러졌고,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공식 추모곡으로 지정됐다. 24주기였던 지난 2004년,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부르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대선 후보 때 기타를 퉁기며 '상록수'를 부르던 영상에 이어 우리가 두 번째 소절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부를 땐 노래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울컥한 나머지 공연이 잠시 멈출 뻔했다. 어느덧 그가 세상을 뜬 지 내년이면 10년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노무현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노래 공연 뒤 경남 교사들과 함께 인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참배 노래 공연 뒤 경남 교사들과 함께 인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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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듯하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던 한 시간짜리 작은 공연이 끝났고, 서로 오랜 친구들처럼 감동을 나눴다. 가수와 전문 연주자가 아닌 다음에야 음악적 역량과 수준은 떨어질지언정 노래로 전하려는 진심이 통한 것이다. 노래는 대화의 물꼬를 텄고, 첫 만남인데도 광주 교사와 경남 교사 사이에 '정서적 거리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얼마 전 5.18 진상규명 특별법이 통과되는 걸 보고 제 일처럼 기뻤습니다. 사실상 진상규명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진상규명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되신 3.15 영령과 유가족들도 기뻐하실 거라 믿습니다."

이는 광주의 젊은 교사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과연 함께 부를 수 있을까라는 '우문'에 대한 경남 교사들의 '현답'인 셈이다. 그들의 가슴 속에 3.15 마산이 민주주의의 발원지라면, 5.18 광주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터전으로 굳건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당일 오후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이른 아침 떠날 때보다 더 설렌 이유를 알겠다.

태그:#3.15의거, #5.18광주민주화운동, #임을 위한 행진곡,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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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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