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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천을 따라 걷노라면 교보빌딩을 지나자마자 좌측에는 미대사관이, 우측에는 종로소방서가 있다. 그리고 종로소방서 동쪽에는 종로구청, 북쪽에는 이마빌딩 등 여러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
 
정도전 집터 일대, 현재의 모습.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서 표시해 봤다.
 정도전 집터 일대, 현재의 모습.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서 표시해 봤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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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청 민원실 입구에는 이 일대 모두가 바로 조선 건국의 1등공신, 삼봉 정도전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광화문광장에서 종로구청 앞을 거쳐 우정국로까지의 도로를 정도전의 호를 따서 삼봉로라고 지은 것이다.

현 종로구청을 비롯해 그 뒤편으로 넓게 정도전의 집터였다니 과연 조선 최고의 건국공신답다. 당시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 정문 앞은 궐외각사들이 서있는 육조거리가 조성되었으며, 이 육조거리 바로 뒤에 자신의 집 터를 정한 것이다.
 
종로구청 일대가 '정도전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종로구청민원실' 출입구 좌측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종로구청 일대가 "정도전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종로구청민원실" 출입구 좌측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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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태조 이성계의 최측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를 수립했지만, 역성혁명 6년 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정도전은 측근들과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자리를 하고 있다 피습 당했다. 그 위치는 현 일본대사관 뒤 트윈트리타워 일대다. 이렇게 숨진 정도전은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권과 더불어 복권이 되기까지 그저 육신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역적이 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그의 복권시기는 대원군의 왕권 강화와 관계 된다. 당시 대원군은 외세에 대항하고, 노론의 세도정치를 혁파하기 위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그 방법으로 경복궁을 중건하던 때다.

즉 조선 건국 후 한양천도 때 건립한 경복궁이 임진왜란 이후 폐허 속에서 다시 조선의 법궁으로 탄생될 때 정도전도 복권된 것이다. 왜냐하면 한양천도 당시 새로 건립되는 법궁의 위치와 명칭 그리고 주요 전각들에 대한 이름에 정도전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시경>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끝의 두 글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뿐만 아니라 정전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 침전인 '강녕전'을 비롯해 '연생전', '경성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초기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참고로, 현재 경복궁 내 주요건물인 '경회루'는 정도전 사후인 세조 때 지어진 것이며, '향원정'의 경우 연못은 세조 때 조성된 것이며, '취노정'이란 정자는 멸실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향원정은 고종 때 건립되면서 작명된 것이다. 또한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경복궁 초기의 건물이기는 하지만 정도전이 죽은 뒤인 세종 때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정도전에 의해 '정문'이라 작명된 지금의 '광화문'이란 명칭도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개명된 것이다.

참으로 질긴 땅의 기억

정도전은 이곳에서 4년밖에 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역적이 되어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장자는 참변 당시 태조의 안변군 석왕사 삼성제 발원을 위해 수행 중이어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고,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떠난 정도전의 집은 조정에 몰수되었고, 그후 궁중에서 사용하는 수레·말·마구·목장 등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복시'와 지금의 중고교에 해당하는 관립교육기관인 4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중학당'이 들어섰다.

그런데 조선후기 한양 인문지리서인 <한경지략>에 의하면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이 자리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가의 서당 자리요, 지금 제용감(왕실용 옷감과 의복의 염색·직조를 담당한 관청) 터는 정도전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는 정도전가의 마궐(마구간) 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땅의 기억'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마구간 터는 일제강점기 이후 기마경찰서로 사용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 서울기마경찰대로 이름만 바뀐 채 지속되다가 1972년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했다. 그 후 이곳에는 빌딩이 들어섰지만 그 이름은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이마(利馬)빌딩'이다. 또 '서당'에 들어섰다는 '중학당'에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수송초등학교가 들어섰다가 1976년 화재를 입은 뒤 폐교하여 현재는 종로구청이 위치하고 있다.
 
정도전 집에서 마구간 자리에 위치한 이마(利馬)빌딩, 그 이름 역시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정도전 집에서 마구간 자리에 위치한 이마(利馬)빌딩, 그 이름 역시 ‘말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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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실학자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과천현 편에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에서 동쪽으로 18리, 양재역에서 동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다"는 기록에 근거해 1989년 그의 후손들이 우면산을 뒤진 끝에 현 양재고교 정문 앞 쌈지공원(서초동 산 23-1)에서 묘를 발굴했다.

그곳에서 머리 부분의 유골이 나왔는데 왕자의 난 때 참수되었다는 신록의 기록과 일치하며, 또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도 함께 출토됐지만 결정적 증거인 묘지(墓誌 :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가 도굴된 상태여서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마무리됐다. 한편 그때 발굴된 유골은 정도전의 사당(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 문헌사 부근에 안치되었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뒤바뀐 승패

정몽주와 정도전은 고려 말 혼란기 속에서 목은 이색 문하의 선후배 관계였다. 이미 고려 전역에 명성을 크게 떨친 정몽주를 만난 정도전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동경했다. 정몽주 역시 유학에 힘을 쏟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정도전을 좋아했다. 이러한 관계로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기본 틀을 세우는데 지침서 역할을 했던 <맹자>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정몽주다.

정도전은 이 책을 읽으며 '민심은 곧 하늘'이라는 '민본주의'를 깨우쳤고, 민심을 잃은 왕조는 혁명을 일으켜 바꾸어야 한다는 사상을 터득한 것이다. 이로써 그토록 가까웠던 정도전과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혁명'과 '개혁'으로 뜻을 달리하게 되었고, 결국 정도전의 역성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정몽주는 이방원의 칼에 의해 선죽교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색 문하에서 함께 배웠지만 끝내 조선건국을 두고 서로 대립하다 결국 조선건국 전후로 모두 암살되고만  정몽주(좌)와 정도전. 위의 초상은 정부표준영정이다.
 이색 문하에서 함께 배웠지만 끝내 조선건국을 두고 서로 대립하다 결국 조선건국 전후로 모두 암살되고만 정몽주(좌)와 정도전. 위의 초상은 정부표준영정이다.
ⓒ 전통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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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승자와 패자는 명확히 갈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불과 6년 뒤 역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은 역적의 굴레를 쓴 반면 정몽주는 영의정부사로 증직받아 화려하게 부활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을 위협하는 정도전은 역적이어야 했고, 임금에게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는 충신의 사표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종의 통치철학은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정몽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충신의 사표로 남아 있다.

이렇게 려말선초의 격동기 속에서 승자와 패자는 다시 뒤바뀌었지만 나는 여전히 승자는 정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정도전의 민본주의철학은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여 조선 오백년을 관통하는 통치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영향을 받아서 조선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왕조가 찬란한 문화를 이루며 500년을 이었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도전의 민본주의가 조선을 관통하는 통치철학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도전은 '현실'에서 승리했고, 정몽주는 '관념'에서 승리했을 뿐이다.
 
정도전의 집터 동쪽으로 바로 옆 ‘수송공원’에 위치한 목은 이색 사당. 사당 입구에 서있는 빌딩도 그 의미를 되새겨 ‘목은관’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정도전의 집터 동쪽으로 바로 옆 ‘수송공원’에 위치한 목은 이색 사당. 사당 입구에 서있는 빌딩도 그 의미를 되새겨 ‘목은관’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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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간단하나마 정도전의 집터에서 그를 생각하며 이곳을 떠나려 하니 '장소의 역사'는 참으로 질기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바로 옆 '종로구 수송공원'에는 다름 아닌 이들 정도전과 정몽주의 스승, 목은 이색의 사당이 위치해 있다. 물론 이색은 제자 정도전과 뜻을 달리해 고난을 치렀지만 '역적이 되어 사라진 제자가 안타까워 그의 집터 옆에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태그:#정도전, #북촌답사, #북촌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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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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