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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할 때 꼭 빼놓지 않는 곳이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다. 특히 유럽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박물관과 미술관은 어느 도시에서든 필수코스다. 바티칸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을 비롯하여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의 경우 입장하는데 줄 서는 시간만 1시간 이상인 경우가 다반사다.

왜 사람들은 뙤약볕 아래 몇 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람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박물관과 미술관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 기억의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을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온 통합유럽연구회가 이번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연구 주제로 택했다. 책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책과 함께 펴냄)는 그 연구의 결과물이다.

통합유럽연구회는 유럽통합의 역사적 과정이 오늘날 유럽사회에 미치는 정치사회학적 함의를 연구하기 위해 2007년도에 결성된 연구회다. 그동안 <인물로 보는 유럽통합사>(2010),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2013), <유럽을 만든 대학들>(2015), <조약으로 보는 유럽통합사>(2016) 등을 출간해왔다.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는 24명의 유럽 전문가가 유럽 이야기의 보고인 29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해 유럽이 분열과 통합, 갈등과 협력 과정을 겪으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박물관의 기원이 되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부터 박물관들의 플랫폼인 신개념 박물관 유로피아나 프로젝트까지 형태도 주제도 장소도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 여행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책을 덮을 땐 마치 유럽 곳곳을 누비며 박물관 미술관 순례를 다녀온 듯 다리마저 뻐근해진다.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입담 좋은 가이드와 함께 박물관 투어를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는 유럽의 기억 장소들을 둘러싼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삶을 바라보게 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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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는 가라

박물관 전시는 철저한 기획에 의해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강조하게끔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람객들의 동선 또한 그러한 기획의도를 반영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박물관과 달리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는 저리 가라고 외치는 박물관이 있다. 파리의 마레지구에 위치하여 12세기 이후 파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통상 카르나발레박물관으로 불리는 파리역사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대개 박물관에서 전시관 동선은 연대순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건물 두 개로 이루어진 이 박물관은 연대기적 순서가 아닌 독특한 순서로 전시관을 배치하고 있다고 한다. 16세기에서 20세기 전시관들을 돌고난 후 맨 마지막에서야 선사시대와 고대시대 전시관들을 만나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파리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이지만 과도한 기원의 신화를 피하기 위한 의도라고.

저자는 카르네발레박물관의 전시물들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지닌 찬란함만이 아니라 그 속살과 이면, 이질성과 다양성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흔히 알려진 파리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치 파리를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이질성의 파리, 무규정의 파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리를 자신의 정체성 아닌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듯 보인다는 거다.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과시가 아니라 비판적 역사의식을 기르는데 있다면 이 얼마나 적합한 콘셉트냐고 저자는 반문한다. 이처럼 유구함과 찬란함을 멀리하는 역사박물관이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개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을 듣는 동안 역시 파리답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흑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라

대개의 역사박물관이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 잘못과 반성을 기억하기 위한 박물관들도 많이 있다. 부다페스트 테러의 집 박물관 역시 그런 박물관들 중의 하나이다.

과거 헝가리의 나치 파시스트 시대와 사회주의 시대(1948~1989)에 자행된 테러와 고문, 반인권적 사건을 역사적 기억의 공간으로 재현해놓은 테러의 집 박물관은 1989년 체제전환 이후 헝가리 사회의 뜨거운 쟁점이 된 '사회주의 시대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쟁의 결과물로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즉 과거에 대한 '사정없는 대면'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헝가리 현대사에 대한 논쟁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하에 건립된 것이다. 테러의 집 박물관은 네오르네상스풍의 건물로 파시스트 사회와 사회주의 시대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기도 했던 장소이다.

공포정치와 테러, 사회주의 시대의 끔찍한 기억들이 남아있는 이 건물이 이제는 과거의 잔혹했던 기억을 대면하게 하는 성찰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박물관은 영웅주의적 승리 사관에서 탈피하여 반성과 회고를 바탕으로 하는 '성찰적' 접근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테러의 집 박물관 전시에서 특별한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직접적인 대면'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피해자들의 사진을 전시한 공간 맞은편에 가해자의 대표 뿐 아니라 그 일을 직접 담당했던 사무실 직원, 관련자들 모두의 사진을 전시함으로써 이들이 영원히 흑역사 속에 기억되게 하는 전시 기법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직접적으로 대면시키지 않는 기존 역사박물관의 전시기법에서 탈피하여 피해자와 더불어 가해자의 실명과 실물 사진까지 전시하는 것이 관람객의 의식과 실제 행동에서 비정상적인 사고 혹은 상황을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 역사에도 이런 장소가 있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더라"는 바로 그 곳, 오랫동안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알려진 곳이다. 여기에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고 더 앞선 1985년에는 고 김근태 전 국회의원이 22일 동안이나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을 받았다.

영화 <남영동 1985>(2012)와 <1987>(2017)을 통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이곳은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취조하고 고문하던 곳으로 경찰청은 2005년 이곳에 인권센터를 설치하여 부정적 이미지에 변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현재 이곳은 1층과 4층, 5층을 개방하여 역사관과 경찰인권사료관, 그리고 박종철기념전시실 등을 두고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관의 전시는 이 건물의 이력 등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들만 있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나 참회의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경찰인권사료관의 전시 또한 전시물만 다를 뿐, 역사의식 없이 나열된 전시물의 단순한 진열이라는 점에서 역사관의 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헝가리가 처했던 비극적 상황을 세계적 관심을 받는 사건으로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대사 박물관의 모범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부다페스트 테러의 집 박물관. 그와 달리 우리 역사 속 테러의 집은 여전히 진정성 없는 1980년대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쉬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통합유럽연구회 지음, 책과함께 펴냄, 2018년 8월, 480쪽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 유럽의 현재와 과거, 미래가 공존하는 기억의 장소들

통합유럽연구회 지음, 책과함께(2018)


태그:#박물관, #미술관,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 #통합유럽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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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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