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6월 항쟁'을 다룬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2017)은 시민들이 가득 모인 광장을 배경으로 끝난다. 뜨거웠던 1987년 6월이 지난 뒤 대한민국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다. 6월 항쟁은 투쟁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에게 승리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1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다큐 영화 <1991, 봄>은 '6월 항쟁' 4년 뒤인 1991년 "승리의 함성이 사그라진 1991년 봄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던 11명의 스러진 청춘들"을 조명하면서 시작한다. 이른바 노태우 정권의 폭압에 항거한 청년들의 '분신 정국'이다. <1991, 봄>이 비추는 광장의 모습은 1987년의 광장과는 확실히 달랐다. 1991년은 지금까지 한국 영화 사상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어두운 시기다. 그 시기를 <1991, 봄>은 정면으로 다룬다.

"당연히 군부독재가 끝나야 되는 그런 시대였는데 (노태우 정권의) 유사 군사 독재가 지속되면서 더 공안탄압으로 밀어붙였단 말이죠." (이부영 전 민주당 부총재)

절망적인 시대가 반복 또는 강화된다고 느낀 청년들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1년 4월 29일 등록금 시위에 나선 명지대 강경대씨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자, 전남대생 박승희씨가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한다. 그해 5월에만 9명이 국가에 저항하며 분신을 택했다. 영화는 인형극, 그래픽 자료, 당시 뉴스 기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1991년을 살아낸 청년들의 모습을 담는다.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혼란스러웠던 그 때, 27살 강기훈씨가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 휘말린다. 1991년 5월 8일 어버이날,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부모에게 한 장짜리 유서를 남긴 뒤 몸에 시너를 뿌린 뒤 투신했다.

김씨가 투신한 그날, 당시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은 "지금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배후설'은 이후 '유서 대필 사건'으로 비화됐고, 이 과정에서 김지하 시인이 <조선>에 쓴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칼럼은 '음모론'을 거든다.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같은 달 20일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썼다"고 결과를 발표한다.

강씨가 구속된 뒤에도 '김기설씨의 필체와 강기훈씨의 필체가 다르다'는 외국인 감정인의 발표 등이 나왔지만, 결국 강씨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3년이 지나서야 만기 출소한다. 이후 강씨는 2015년 5월 돼서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권고로 이뤄진 재심 통해서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게 된다.

음악으로 풀어낸 강기훈의 언어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영화 < 1991, 봄 > 스틸 사진 ⓒ 필앤플랜


강기훈씨는 영화 속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잠깐씩 대화를 나눌 때를 제외하면 주로 배경 음악(연주곡)의 기타 연주자로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라면 응당 들어갈 법한 강기훈씨의 심경을 나타낸 작은 인터뷰도 없다. 영화는 멀찌감치에서 기타 연주자로서의 그의 일상을 조명하는 방법을 택한다. 영화 속에서 강기훈씨는 시종일관 차분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구성은 권경원 감독의 고집에서 비롯됐다.

"강기훈씨는 석방된 이후 매년 5월마다 이 사건을 이야기해왔다. 그 중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고립의 시간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이 말로 표현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강기훈씨는 재심 최종 진술 이후 공적인 자리에서 특별한 말을 남긴 적이 없다. 대신 기타를 들었다. 오로지 음악에 대한 설명만 덧붙이면서. 음악은 강기훈씨가 말 이외에 선택한 다른 언어였고 그건 이 사건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권경원 감독)

처음에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말에 소스라쳤던 강기훈씨는 점차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참여한다. '눈물', '망각', '사라방드', '이별의 전주곡' 등 언어를 대신하는 강기훈씨의 기타곡 총 8곡은 그의 심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강기훈씨가 연주하는 음악은 단순히 BGM으로 보기보다 영화 중간 중간을 가로지르는 주제곡으로 기능한다.
 
'영화 주인공인 강기훈씨는 대체 언제쯤 말을 하는 거야'라는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서 그가 이미 기타 곡을 통해 관객들에게 자신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연주회 자리에 선 강기훈씨의 짤막한 말만으로 말기 암환자이기도 한 강씨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살고 있으며, 어떤 마음으로 기타를 연주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영화는 2014년 4월부터 2018년 개봉하기까지 세 번이나 제목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강기훈 말고 강기타>라는 이름으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했다가 <국가에 대한 예의>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제22회 부산영화제 등에서 상영됐고 개봉할 즈음 다시 <1991, 봄>으로 바뀌었다.

권경원 감독은 지난 17일 오후 열린 <1991, 봄> 기자간담회에서 "<국가에 대한 예의>가 다소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제목으로 바꾸게 됐다"고 밝힌다.

한 줄 평 : 엔딩 크레디트 속 노래의 가사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별점: ★★★☆

 
<1991, 봄> 관련 정보
제목: 1991, 봄 (Courtesy to the Nation)
감독: 권경원
출연: 강기훈 외
제작: (주)해밀픽쳐스
배급: (주)인디플러그
장르: 음악다큐멘터리
상영시간: 89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8년 10월 31일
1991, 봄 강기훈 기타 연주곡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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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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