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1년 넘게 국회 떠도는 '유령' 법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1년 넘게 떠도는 유령 같은 법안이 있습니다. 공공택지에 짓는 아파트의 분양가 공개 항목을 대폭 확대하는 내용의 주택법 개정안입니다.

현재 공공택지에 짓는 아파트 분양가는 시행규칙에 정해진 대로 총 12개 항목에 걸쳐 원가를 공개하도록 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분양원가 공개 항목을 61개로 대폭 늘이고 항목 수도 법으로 못 박았습니다. 건설사들의 '분양가 뻥튀기'를 견제하려는 목적입니다. 소비자들은 분양가 세부 내역을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거품이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건설업계가 "영업 비밀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법안이기도 합니다.

이 법안은 지난해 국회 본회의를 순순히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해 9월 21일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국토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이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관문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발목이 잡혔습니다.

자유한국당 반대 → 지지부진 → 정동영 "법안 철회" → 국토부장관 "시행규칙으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6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권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6월 28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권을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당시 법사위 소속이던 김진태,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법사위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상임위(국토위)를 통과한 법안이 법사위에서 제동 걸린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결국 주택법 개정안은 법사위 제2소위원회로 넘어가 1년 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국토교통부 한 관료에게 이 법안 통과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국회 논의를 지켜보자"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렇게 모두의 뇌리에서 잊히는 듯 했습니다.

이 법안이 다시 화두가 된 것은 지난 10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였습니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정동영 의원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분양원가공개법을 철회하겠다"고 강수를 던졌습니다. 정부가 개혁 의지가 없으니 차라리 해당 법안을 접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시행규칙을 정해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즉, 자유한국당이 반대해 법안이 잠잔다 하더라도, 현재 12개 항목 공개로 되어있는 시행규칙을 수정해 공개 항목을 대폭 늘리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법안이 통과될 때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결국 정 의원이 법안 철회라는 '벼랑끝 전술'로 분양원가 공개 확대라는 약속을 받아낸 형국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승자는 정 의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법과 시행규칙의 차이
 
민주평화당 정동영 의원이 10월 10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의원이 10월 10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다른 승자가 있습니다. 개정안 통과에 적극 반대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분양원가 공개 항목 수를 '법'에 명시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분양원가 항목 수를 법으로 정하냐 아니냐가 왜 중요할까요? 현행 주택법은 분양원가 공개 항목 수를 '시행규칙'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법과 달리 시행규칙은 국회 동의 없이 정부가 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행규칙은 바꾸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이러다보니 공개항목도 정부 성향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합니다.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 2007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항목은 61개였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지난 2012년 3월 규제를 완화하겠다며 아파트 원가 공개 항목을 12개로 줄여버립니다.

주택법 개정안이 법안 본문에 공개항목 수를 명시한 것도 정부 맘대로 공개 항목을 줄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현행대로 분양원가 공개 항목을 '시행규칙'으로 정한다면, 이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건설업계로서는 분양원가 공개 항목이 법에 못 박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습니다. 또한 법안 통과에 반대한 자유한국당도 소기의 목적을 이뤘습니다. 참 씁쓸한 윈윈(win-win)입니다.
 

태그:#분양원가공개, #김진태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