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현장인 갈대공원에서 고인의 흔적을 찾는 김형민 형사

범죄현장인 갈대공원에서 고인의 흔적을 찾는 김형민 형사 ⓒ (주)쇼박스

  
깔끔한 슈트 차림의 한 남자가 평온해 보이는 시골길을 거닐고 있다. 산책 나온 회사원, 아니면 땅 보러 온 부동산 업자? 혹은 취재 기자로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형사이며, 그곳은 과거 살인사건 현장이다. 경제적 여유가 이 영화에서는 그가 나설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실제 범죄 사건을 극화한 영화 <암수살인>이 개봉 2주차를 맞아 관람객 283만3828명(10.14 기준)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10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유가족이 법원에 <암수살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 개봉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타결되어 영화는 무사히 개봉할 수 있었다.
 
김태균 감독은 시한부 엄마와 가족의 이별 이야기를 그린 <봄, 눈>으로 2012년 장편 데뷔를 한 바 있다. 바로 다음 장편이 <암수살인>이다. 무려 6년의 공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준비기간이다. 그는 2012년 11월 10일 SBS에서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869회 감옥에서 온 퍼즐-살인리스트'를 보자마자 부산으로 내려가 실제 모델인 김정수 형사를 만나 실제 범행 현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5년 여간 이어진 끈질긴 인터뷰와 꼼꼼한 취재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영화 <암수살인>이다.
 
 증거를 찾아 강태오를 심문하는 김형민 형사

증거를 찾아 강태오를 심문하는 김형민 형사 ⓒ (주)쇼박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극화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가 쫓는 것은 범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희생자들은 있고, 사라진 건 범인이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범죄 영화의 구도가 그럴 것이다. 희생자가 발견되고 범인을 찾는 구조. 그러나 <암수살인>의 김형민 형사는 그 반대이다. 범인은 있는데, 희생자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범죄, 자백이 있어도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의 조사에 착수하는 무모한 형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다. 편지를 보내던 살인자 이두홍은 지난 7월 감옥에서 자살하고 없지만, 김정수 형사는 생전에 그가 작성한 진술서와 사건 파일을 토대로 지금도 실종된 피해자를 찾고 있다고 한다.

"어디 있노, 니"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자마니(zamani)'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어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 죽은 것이 아니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다 죽으면 그때까지가 그의 수명인 '자마니'인 것이다. 제 명을 다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살해당한 희생자들에게 남은 수명을 되찾아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기억하고 올바르게 추모하는 것이 아닐까. 희생자의 신원을 아는 경우는 유가족이 그들을 기억하지만, 신원 미상의 희생자는 기억과 추모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암수살인>의 김 형사는 "어디 있노, 니"하며 망자에게 힌트라도 달라며 혼잣말한다.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에 감정 이입하고, 그 안타까움에 시신이라도 찾아 잘 보내주려는 형사의 선한 의지가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전부다. 흔히 범죄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액션과 스펙터클, 혹은 유머가 이 영화에서는 자제되고 있다. 그 어떤 방해와 불이익에도 굴하지 않고, 피해자가 마지막 순간 느꼈을 공포를 떠올리며, 묵묵히 그들을 찾아다닌다.
 
 시신이 있을 먼한 곳을 다 파헤친 김형사와 오형사

시신이 있을 먼한 곳을 다 파헤친 김형사와 오형사 ⓒ (주)쇼박스

 
희생자는 고인이 되어 말이 없지만, 그가 살아 있어 자신의 이야기가 대형 스크린에 걸린 것을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 혹은 거실이나 안방의 TV에, 핸드폰의 작은 화면에 무한정 반복되고 있다면? 우리는 유가족의 고통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희생자의 고통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고인에게 심정이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기억과 추모라는 이름의 자마니를 둔다면 그는 비록 고인이어도 아직 살아 있고, 심정을 가질 수 있다. 영화 <암수살인>이 6년여의 긴 준비 기간을 두고도 유가족의 사전 허락 내지는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매우 비난받을 일이나, 영화가 범죄 사건을 소재로 삼아 전면에 바로 희생자의 마지막 순간을 드러내고 희생자에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큰 미덕이다.

요즈음 범죄 실화를 극화한 영상물이 범람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도 범죄 실화 스토리텔링 채널이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잔혹한 화면과 자극적인 구성으로 조회 수를 유도하는 채널도 있지만, 사명감을 갖고 조심스럽게 임하는 크리에이터들도 많이 있다. 피해자의 유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더 나아가 '기억해 달라'라는 전언을 가져오는 크리에이터도 있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에 강하게 항의하는 크리에이터도 있다.

그러나 일부는 라이브 방송 시 스토리텔링 도중 구독자들과 다른 이슈에 빠져 웃고 떠드는 경우가 있는데, 화면에는 계속 사건 현장이나 희생자의 사진이 희미하게나마 걸려 있는 경우가 있어 매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당신은 왜 범죄 실화를 스토리텔링 하는가? 그를 추모하고 싶은 것인가? 미제사건의 해결을 돕고 싶은 것인가? 영화 <암수살인>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그들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부디 고인을 올바르게 추모하는 의도이길 빈다.
암수살인 김태균 김윤석 진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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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봐도 성경이 떠오르는 노잼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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